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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예수님이 선택한 평범한 사람들


 유럽의 성당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치 현실을 초월한 고결한 성인인 양 채색 유리창에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예수님이 선택한 제자들은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아무런 자격도 없고 합당하지도 않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선택되었다. 랍비 한 사람 없었고, 정치 성향도 제각각이었고, 출신 또한 보잘것없었다.
 이러한 사도들을 선택했기 때문에 제자들의 훈련 과정은 쉽지 않았다. 열두 제자가의 우둔함에 예수님도 종종 그들을 꾸짖으셨다.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마 15:16)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 16:9, 막 8:17)
 "미련하고 …… 더디 믿는 자들이여"(눅 24:25)

  사도들의 영적 이해력이 부족한 탓에,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부활하신 후에도 40일 동안 그들을 가르치셨다. 겸손이 부족하여 서로 누가 위대한가를 놓고 다툼을 벌일 때도 있어 예수님께서 친히 발을 씻기시며 겸손의 본을 보여 주셨다. 믿음이 부족한 탓에 몇 차례나 '믿음이 작은 자'라 꾸짖으시고 '제자들 앞에서' 의도적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헌신이 부족하여 예수님의 체포와 동시에 뿔뿔이 흩어져, 예수님은 그들이 믿음을 보전하고 천국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중보기도도 하셨다. 무엇보다도 능력이 부족하여 원수들과도 맞서지 못하고 귀신을 내쫓는데도 실패했다. 이러한 제자들을 위해 예수님은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시어 그들 안에 거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약속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이 약속은 온전히 성취되었다.

 예수님이 이러한 제자들을 선택하신 이유는 그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발휘할 때 그 권능의 출처를 의심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지 않으시기 위해서다. 그분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해지고, 세상의 약한 것들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하나님은 토기장이가 진흙을 빚듯 그들을 목적에 맞게 변화시켜 사용하신다.

 베드로는 결코 훈련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리더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호기심, 진취적 기상, 참여이다.
 예수님에게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설명해 달라고 요구한 사람도, 얼마나 자주 용서해야 하냐고 묻던 사람도 베드로였다. 그는 항상 더 많이 알고, 더 잘 이해하기를 원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물었을 때 가장 담대하고 확실하게 고백했던, 물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이 '오라'말씀하셨을때 망설임 없이 폭풍가운데 뛰어내리던, 예수님을 잡으러 온 수백 명의 군인들 사이에서 앞장서 칼을 휘두르던 모습이 베드로가 가진 리더의 자질을 보여준다.
 물 위를 걷다 빠져가는 베드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던 베드로의 모습 이면에는 폭풍우 가운데 예수님을 향해 발을 내딛고, 대제사장의 집까지 예수님을 따라간 베드로의 모습이 있다.

 안드레는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네 제자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지지 않은 제자다. 그를 언급하는 성경 구절은 대부분 그가 베드로의 동생임을 소개하는 것 뿐이다. 하지만 안드레는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하는 강인한 힘과 남자다운 뚝심을 지닌 사람이었으며, 예수님을 만나기 전부터 세례요한의 제자로 살며 모든 안락함을 떨쳐버리고 광야의 사역을 행했다.
 안드레의 이름이 언급된 곳에는 그가 항상 누군가를 예수님께 인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언제나 한 무리의 군중이 아닌 소수의 사람 또는 개인을 데리고 왔다. 다른 제자들도 사람을을 예수님께 인도할 때는 안드레를 통하여 인도하기도 했다. 베드로처럼 많은 군중들 앞에서 말씀을 전하여 단번에 3천 명의 신자를 인도하는 능력은 없었지만, 대신 그는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리고 올 수 있는 사람이었고, 한 아이가 내민 보리떡과 물고기를 예수님 앞에 가져간 사람이었다.

 야고보의 삶은 '열정'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예수님이 야고보와 요한에게 지어 주신'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에서 그의 성품을 알 수 있다. 열정이 넘치는 만큼 많은 욕심도 가지고 있었고, 다른 제자들보다 더욱 유력한 제자가 되고자 했다. 누가 뛰어난지 싸우던 자리에도 있었고, 어머니를 불러와 아들들이 예수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간청하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영광의 면류관을 원하던 그에게 고난의 잔을 허락하셨다. 그는 권력을 원했고 예수님은 그에게 종의 길을 걷게 하셨다. 그는 높은 자리를 원했고 예수님은 그에게 순교자의 무덤을 허락하셨다. 야고보는 열두 제자 가운데 가장 먼저 믿음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가 되었다.
   
 요한은 진리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는 빛과 어둠, 하나님과 사탄 등 자신의 성격처럼 확실한 대조를 이루는 언어들을 사용하고, 명확하고 때로는 절대적인 형식으로 진리를 전했다. 그의 열정인 진리를 애매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다. 
 또한 요한은 신약성경 저자 가운데 누구보다도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사랑은 그의 타고난 성품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요한의 이름이 단독으로 등장하는 유일한 부분에서(막9:38) 그는 편협하고 배타적인 모습을 고백한다. 처음에는 그도 야고보와 같은 별명을 받은 거칠고 강인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과 3년 동안 지내며 자기중심적인 열혈 청년은 균형을 갖춘 성숙한 사람으로 변화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요한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을 차츰 깨닫기 시작하고,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 등 예수님이 보여주신 겸손의 모습들을 자세히 기록한다. 이후 그는 초대교회 신자들 사이에서 큰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사랑의 사도'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빌립은 사실과 계산에 근거해 원리원칙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현실주의자였다. 오병이어 사건 때 그는 회계를 담당한 사도답게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다고 현실을 말하며,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는 상황에서 어찌 할 바를 몰라 그들을 안드레에게 맡긴다. 또한 예수님과의 마지막 날에는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14:8)'라며 확실한 증거를 요구했다. 
 하지만 빌립은 예수님이 직접 찾으시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첫 번째 인물이다. 예수님은 믿음 약한 그에게서도 참 제자의 모습을 보신 것이다.  빌립은 구약성경을 깊이 공부하며 곧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중이었고,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친구 나다나엘에게 달려가 자신있게 "와서 보라"며 메시아에 대해 전파했다. 이는 주님이 얼마나 많은 은혜를 베풀어 그의 심령을 준비하셨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나다나엘 바돌로매는 빌립이 예수님께 인도한 제자다. 그 역시 성경의 진리를 사랑했고, 하나님의 진리를 사모한 구도자였다.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나신다는 예언을 알고 있던 그는 형편없는 마을 나사렛에서 나온 예수에 대해 믿지 않았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말한다.
 다행히도 그의 편견은 진리를 원하는 열정만큼 강하지 않았고, 그는 '와 보라'는 빌립의 말에 예수님을 만나러 간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보시자마자 그의 사람됨을 칭찬하셨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 또한 예수님은 자기만의 공간인 무화과나무 아래서 공부하던 나다나엘을 잘 알고 계셨고, 이 사실에 놀란 나다나엘은 곧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다. 다른 제자들이 끝까지 알지 못했던 진리를 예수님을 만난 날 깨달은 것이다. 그는 예수님이 인정한 진실하고 깨끗한 마음의 사람이었다.

 마태는 세리였다. 탈무드에서도 세리에게는 속임수와 거짓말을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가르칠 정도로 동족으로부터 경멸을 당했고, 성전에서도 이방인과 같은 취급을 당해야  했다. 하지만 이런 멸시로 인한 영적 갈급함을 마태는 구약성경을 공부하며 채워 나갔다. 그러던 중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있던 그에게 나를 따르라 말씀하셨고, 마태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 그 결과 마태복음에는 구약성경을 인용한 구절이 100회 가량 등장한다. 이것은 마가,누가,요한복음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횟수이다. 

 도마는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예수님을 향한 충성이 있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나는 말에는 비관주의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충성을 다하려는 도마의 용기가 드러난다. 도마의 말에 제자들은 묵묵히 예수님을 따라 베다니로 향했다. 이는 그의 말이 제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의심하였기 때문에 '의심하는 도마'로 여겨지곤 하지만, 사실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을 보기 전까지는 부활을 믿지 못했다. 모든 제자가 모인 자리에 도마만 없었던 것은 그의 슬픔이 다른 제자들보다 더 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도마의 입에서는 사도들의 고백 가운데 가장 위대한 고백이 터져나왔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보다 작고, 어리고, 조용히 뒷전에 물러나 있던 사람이었다. 그의 특징이 있다면 바로 눈에 띄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하겠다. 그의 존재는 히브리서 11장 33-38절에 등장하는 무명의 신자들을 생각나게 한다. 세상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영원한 세상에서는 작은 야고보와 같은 이들의 이름과 증거가 밝히 드러날 것이고, 영원한 세상에서 온전한 상급을 받을 것이다.

  다대오, 야고보의 아들 유다, 가룟이 아닌 유다라고도 불리는 이 제자는 예수님의 다락방 고별 강연에서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요14:22)라고 물었다. 그는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만류하려 들지 않았고, 오히려 하찮은 자신들에게만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었다.
짧은 이야기지만 그 속에서 다대오의 유순하고 겸손한 성품을 볼 수 있다. 
  다대오는 '젖가슴에 안긴 아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과 같은 사람도, 다대오와 같은 사람도 모두 사용하신다. 고대 기록들을 살펴보면, 유순한 영혼을 소유한 다대오의 복음 증거는 그보다 좀 더 담대하고 유명했던 사도들의 증언 못지 않게 강력하고 효과적었던 것을 보게 된다.

 시몬은 열심당원이었다. 그들은 철저한 애국주의자로 신념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있었다. 테러조차 용납할 정도로 격렬한 정치 신념을 지닌 그가 어쩌면 가룟 유다보다 배신자가 될 가능성이 더 높았다. 또한 그의 곁에는 그가 지닌 정치 신념의 정반대편인, 제거 대상인 세리 마태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시몬은 예수님을 통해 참 신자로 변화되었다. 민족을 향했던 그의 뜨거운 열정은 그리스도를 위한 헌신으로 바뀌었다. 그의 이름이 성경에서 언급되지 않는 것은 어쩌면 그의 변화된 모습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가룟 유다는 제자들 중 유일하게 갈릴리 출신이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외부인이라고 생각하며 배신 행위를 정당화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님이 배신을 예고하셨을 때 한 사람도 가룟 유다를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그의 위선은 완벽했다. 
 그런 유다에게 예수님은 마음의 계획을 실행하지 말 것을 누차 경고하셨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도 불의한 청지기, 결혼잔치 예복 등 그에게 직접 해당하는 말씀들이 많았고, 자신을 배신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마 26:24) 경고하기도 하셨다. 하지만 유다는 그 말씀에 완전히 무감각했고, 끝까지 자신을 위장했다. 결국 예수님은 마귀가 된 유다를 밖으로 내보내고 나서야 성만찬을 제정하셨다. 
 결국 그는 진정한 회개를 택하지 않고 양심의 소리를 묵살하기 위한 스스로의 방법을 택했다. 그의 삶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그분과 가까운 관계를 맺더라도 얼마든지 죄로 인해 강퍅해질 수 있다는 사실과, 그의 큰 죄와 배신도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가룟 유다는 주님의 인내와 긍휼을 보여 주는 산 증인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유다가 무엇을 계획하는지 다 아시면서도 그에게 오직 친절과 사랑을 베푸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잡히던 밤, 가룟 유다가 존경의 표시인 입맞춤을 통해 예수님을 팔고자 나타났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변함없는 태도로 '친구'라고 부르셨다.(마26: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