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다른 이야기/마음나누기

2011.9.18.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현대의 교육은 중,고등학교처럼 가만히 앉아 있으면 교사가 들어와 수업을 하는 방식이거나 대학교처럼 교수를 찾아 학생이 움직이는 방식이다. 이 둘 모두 가르치는 사람이 지식만을 전달한다. 2000년 전 이스라엘에서의 스승과 제자 관계는 이와 달랐다. 제자는 스승과 함께 먹고 자고 일하며 스승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배웠다.

 그렇게 스승의 작은 습관까지도 배우며 가르침을 얻다 보면, 어느 날 스승은 제자에게 자신만의 '기도문'을 가르친다. 이 기도문은 그저 주문같은 의미가 아니다. 이 기도문에는 스승이 가르치고자 했던 것, 즉 자신의 삶 그 자체에 대한 정수가 담겨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주기도문 또한 그런 의미가 있다. 주기도문을 가르칠 때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셨다. 주기도문이 기도에 대한 모든 예수님의 이야기에 대한 '결론'이기 때문이다.


2011. 9. 18. 저녁예배
 
 
 중언부언하는 기도란 말에 대해서 학자간에 의견이 많이 나누어진다고 한다. 하지만 '말을 많이 하는 것'이, 무조건적으로 외치는 것이 옳은 기도가 아니란 건 의견이 갈릴 여지도 없이 확실하다. 형식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마다 성향도 다르고 기도하는 방식도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자신이 올리는 기도에 얼마나 진정성이 있느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입술의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군더더기 없이 주께 열납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기복신앙의 영향 탓에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말을 기독교에서 실현하려 한다. 나의 '시간'을 많이 드리면, 또는 '정성'을 많이 드리면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물론 간절하게, 애타게 조르면 들어주지 않을 부모님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그것이 아이를 위한 최선의 길이 아닐 때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어주셨지만, 그 연장된 시간 동안 므낫세가 태어났고 이스라엘은 주변 우상숭배 국가보다 더 악한 나라가 되었다.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미리 아시는데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하나님께 맡기고, 사랑하는 자녀에게 항상 좋은 것으로 주고 싶은 하나님의 마음을 믿으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그 모습 자체를 원하셔서 그러시지 않을까? 
우리는 '무엇을'구하기보다 무엇을 '구하기'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구하기' 자체에 초점을 두고 주기도문의 시작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원하는지, 그 뜻이 이루지는 것을 원하고 믿는지 있는 그대로 듣고 싶어 하신다는 걸 깨닫게 된다. 화려한 미사여구로 장식된, 우리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아첨하는 기도가 아닌, 힘들면 힘들다고, 기쁘면 기쁘다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울고 웃으며 이야기하는 우리의 모습을 기다리고 계시진 않을까?



 
아침에 예배를 준비하며, 예배 외적인 일(일과 예배가 같은 장소다 보니 생기는 압박감)들로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내 마음을 보게 됐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가진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외에도 우리 스스로 희생제물을 바치며 예배를 드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예전에는 낡은 오르간 하나면 예배할 수 있는 공간이었는데, 다양한 악기가 생기고 거기에 필요한 음향시설과 PPT, 카메라 등 많은 물건들이 따라오면서 예배를 준비하는 사람의 수도 많아졌다. 물론 자발적으로 동참한다면 좋은 일이지만,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나아오기는 힘들고, 중간에 빈 자리가 생기면 여태까지 해 오던 일을 쉽게 접을 순 없으니 대타를 구하느라 바쁘다.
 누군가가 그의 맡은 일 때문에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고 마음이 어려운데도, 맡을 사람이 없다며 '힘내, 어쩔 수 없잖니, 너밖에 없잖니'라는 말로 '희생'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예배를 위해 '봉사'하는 손길은 있어야 하지만, 예배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생기는 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맞지 않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우리 예배에 바라시는 건 우리의 마음이다. 하지만 우리의 만족을 위해, 또는 '최소한 이 정도는 해야지'하는 마음들로 인해 예배에 마음을 온전히 드리지 못하는 상태에서 하는 예배가 과연 온전한 예배일까? 언젠가 했던 이야기이지만, 모두가 힘들고 침체되어 있다면 무반주로, 또는 인도자 없이 찬양을 하더라도 그 간절함으로 부르짖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님께서 오시지 않는다면 화려한 음악과 조명과 이런 것들 모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라는 마음이 필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