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는 먹고 자고 입는 일을 모두 그 안에서 해결하면서도 나라를 지키는 임무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다양한 일자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디로 끌려(?)가느냐에 따라 인생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의 장르가 전혀 다르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최전방에서 눈 앞에 보이는 적, 그리고 더위, 추위와 싸워 가며(북한:우와 따뜻한 최전방이다) 경계근무와 휴식, 그 사이 작업만 반복하다가 돌아오는 반면, 또 누군가는 후방에서 시간적인 여건이 보장되는 덕에 자격증만 수십 개를 따면서 돌아오기도 합니다.
위의 두 누군가들은 입대할 땐 옆자리였다 해도 저렇게 운명이 갈리기도 합니다만, 이건 다른 편에 다루기로 하고... 중요한 건, 어떤 보직을 맡든 군대에서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게 하나 있는데요. 바로 '멍 때리는 시간'입니다. 특수한 부대가 아닌 이상 불침번 근무, 동초, 기타 경계근무 등 자다가 중간에 깨서(@#$&!) 돌아가면서 돌발상황에 대비하는 임무를 띄게 됩니다. 17시 일과 종료 후 다음날 아침 9시까지 이어지는 당직근무, 주말이면 아침 9시부터 다음날 아침 9시까지. 이런 시간 내내 뭔가 일을 해야 한다면 아마 돌겠죠? 그래서 멍 때리는 시간이 상당히 많이 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군대에서 영어공부를 해라, 자격증을 따라 하는 이야기들은 부대 여건이 보장될 때 이야기입니다. 이건 제가 여기서 아무리 떠들어 봐야 현실은 시궁창인 분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저 멍때리는 시간에 무엇을 할까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1. 특별한 주제의 기도
종교가 있는 분들이라면 특별한 기도제목 하나를 놓고 기도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경계근무를 서는 시간. 캄캄한 밤 고요한 공간에 전우와 둘이 있다 보면 집에 가고 싶은 생각부터 시작해서 이런저런 생각들에 울적해지기 마련인데, 이 시간에 특별한 주제의 기도를 드리는 것도 좋습니다. 아직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는 경우에는 비전에 대한 기도를, 입대 전 만났던 어떤 처자가 눈에 아른아른거리면 배우자에 대한 기도를, 군대 밖에서 정리하지 못하고 나온 일이나 집에 큰 문제가 있는 경우엔 그와 관련된 기도들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눈 감고 기도해선 안되겠죠? 눈 뜨고 마음속으로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전역 전에 GOP부대에 들어가서 근무를 잠깐 선 적이 있는데요. 무슨 생각을 할 새도 없이 이 초소에서 저 초소로 이동하며 근무를 서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눈 앞에는 어둠 속에 무성한 수풀 뿐이라 적이 오는지 어떤지를 보기에도 바쁩니다. 이럴 때부터 기도를 시작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어느 정도 부대에 적응이 되고, 눈 감아도 내가 근무를 맡고 있는 지역에 무엇이 있는지 알 정도라 멍때리면서도 눈 앞에 배경이 바뀌면 알 수 있을 정도의 '내공'이 쌓인 뒤에야 깊이있는 기도를 할 수 있겠죠?
2. 더 큰 생각들
오늘은 뭘 먹을지, 들어가서 뭘 할지, 요즘 부대마다 설치된 쿡 티비로 뭘 볼지 이런 생각들 말고, 조금 더 깊이 있는 생각들을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은 충분합니다. 너무 충분해서 탈이죠... 우리나라, 이 국가에 대한 생각, 정치에 대한 내 입장, 우리 가족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어떻게 대해야 할 지, 이런 생각들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분명히 하는 시간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게 뭐가 중요하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사회에 나오면 오히려 수많은 정보 때문에 뭐가 뭔지, 내가 무슨 생각을 가졌는지도 헷갈리게 됩니다. 그려면 인터넷에서 아무 생각없이 쓴 누군가의 생각에 동조하는 게 더 편해지는데, 문제는 언론이든 인터넷 커뮤니티든 편향된 시각이 너무 많다는 거죠. 내 가치관이 틀려도 상관없습니다. 일단 어느 한 방향을 분명히 하고 조금씩 맞춰가는 것이 제대 후 갈팡질팡하는 것 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3. 사업 아이템 구상(?)
이건 제 경우에 한정된 일일 것 같지만, 저는 이런저런 공상에 빠지는 경우가 많아서 제대와 동시에 많은 아이디어들을 들고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 시작하더라도, 당직근무 시간 내내 생각을 하다 보면 의외로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너무 많은 걸 드러내면 안 되기 때문에 3문장 이하로 써 보겠습니다.
-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을 위해, 한강변에 간이 편의점 자리에 자전거 보관 / 옷 보관 / 샤워시설을 갖춘 무언가를 만들어 볼까 생각을 해 봤습니다. 문제는 겨울이 되면 텅텅 비기 때문에 어떻게 수익을 낼 지, 그리고 외진 곳이기 때문에 밤중에 무서운 학생들의 아지트가 될 수 있다는 점 등이 아직 고민중입니다. 아이디어가 구체화되면 박원순시장님께 트윗으로 한번 제안을 해 볼까 합니다만... 저는 경기도민;
- 겉만 보고서는 무슨 맛인지 모르는 랜덤 과자. 뭔가 먹고는 싶은데 딱히 뭘 고르기 어렵거나 귀찮거나 어찌어찌할 때를 위한 과자랄까요? 이건 제가 혼자 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라 어디 식품회사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구상은 하지 않았습니다. 식품회사 직원 분이 이 글을 보신다면 시도해 보셔도 좋을 듯 합니다.
- 레벨업대신 운동을 하는 게임. 운동을 게을리 하면 캐릭터는 점차 약해지고, 특정 부위만 운동하면 순발력이 떨어지는 등의 요소를 통해, 무조건적인 노가다성 플레이가 아니면서도 게임회사 입장에서는 고객들이 강해지기 위해 꾸준히 게임에 접속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입니다. 근력과 운동효과는 캐릭터를 만들 때부터 타고나는 현실적인 모습도 구현할 수 있곘고, 공성전 등 특별한 이벤트를 앞두고서는 다들 체력단련에 열중인 진풍경도 보일 것 같습니다. 이건 제가 게임회사를 갈 건 아니지만 나름 구상을 많이 해 놨는데.. 여기까지만.
뭐 이런 잡생각들을 적어 뒀습니다. 그래도 생각보다 그럴듯하지 않나요?^^
4.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해줄 말들
평소에 잘 만나지 않던 친구들까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생각나는 시기입니다. 되돌아보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내게 도움을 줬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만나면 꼭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적어두는 것도 좋은 시간입니다. 저는 해야지해야지 하다가 결국 못 하거나, 편지를 썼다가 나중에 읽어보니 너무 오글거려서 고이 간직하는 그런 게 많네요... 즐길거리가 많은 사회에서는 이런 시간들을 내기가 쉽지 않으니, 할 게 없어 미치겠는 이 시기에 이런 말들을 적어두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이외에, 멍 때리는 시간이 아니라도 군대에서 뭔가 남겨가야 할 것들에 대해 간단히 적어 보겠습니다.
다른 글로 쓰려고 했는데 귀찮아서;;
5. 복종과 헌신
도대체 내가 왜 여기서 이 사람한테 이렇게 대해야 하나 싶은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건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행히도 내 주위에는 내가 아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고, 체면치레를 해야 할 만큼 내 계급이 저 사람보다 높지도 않습니다. 놀이라고, 연습이라고 생각하고 참아보는 것도 다른 곳에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부당한 요구를 하고서는 안 들어 준다고 뭐라 하는 사람 앞에서는 그냥 '내가 군인놀이 해 준다'라는 생각으로 숙이고 들어갔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죠?
물론 내가 당장 죽을 것 같은데 캔디마냥 참고 참고 또 참을 것까진 없습니다. 일단 살아야죠. 사람마다 감당할 수 있는 게 다르고 또 부대마다 같은 상황이라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다르기 때문에, 제 3자가 어떤 이야기를 해 준다 한들 정답은 없습니다. 내가 내는 해답이 더 중요합니다. 지혜롭게 대처하시기 바랍니다.
6. 아들에게 보여줄 사진 찍기
이건 간부들의 도움을 좀 받아야겠죠? 잘못 찍으면 또 잡혀가는 경우가 생기니, 부대 위치가 드러나는 지형이나 총기함, 무기고, 초소가 보이는 곳에서는 사진을 찍지 맙시다. 페이스북에 올리는 즉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신고당합니다ㅠ.ㅠ
저는 신병교육대대에 있어서 조교들이 멋지게 차려입고 나온 날에는 '나중에 아들 보여줄 사진 찍어 놔야지~'하며 사진을 열심히 찍어 줬습니다. 물론 페이스북에 올리면 저나 그네들이나 줄줄히 철컹철컹이기 때문에 군생활 동안에는 인화해서 나눠줬고, 전역하는 친구들한테는 카톡으로 보내 줬네요. 제가 인화해 준 사진들을 신나서 관물대에 걸어둔 것을 보면 저도 흐뭇해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찍어주다 보니 교관 복장을 한 제 사진은 없네요 ㅠ_ㅠ 나는 왜 항상 이런식일까..
이렇게 제 메모장에 적혀있던 글을 조금 풀어 봤습니다.
이 외에도, 독서, 공부, 화를 다스리기, 용서하기 등이 적혀있는데..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생각이 안 나서 패스하겠습니다...^^
오늘도 제 친구가 다큐에 나온 모습이 유머게시판에 올라왔네요.
저 시계 찬 녀석이 제 친구입니다.
이 친구는 전역한 지 3년이 지났는데 맨날 입소 전날 모습만 나오네요 ㅋㅋㅋㅋ
뭐... 어쨌든 저렇게 시간은 가긴 갑니다. 저 친구도 이제 일어나면 집이에요.
하지만 지나가는 시간 가운데 무엇을 건져올릴지는 각자의 몫입니다.
버리는 1년 9개월이 될 것인지, 하나라도 더 주워오는 시간이 될 것인지.. 열심히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