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라어로 믿음을 '피스티스'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신실', '충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헬라어로는 신실, 충성, 믿음이 구별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믿음이란 단어가 나올 때 신실 혹은 충성으로 대체하면 그 의미를 더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는 마태복음 21장 22절 말씀을 참 좋아합니다. 믿고 구하면 다 주신다니,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기도하고 나서 믿고 구했으니 이제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믿음을 신실과 충성으로 대체하면 '너희가 신실하고 구하면 다 받는다'는 말이 됩니다. 신실한 사람은 헛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신실한 사람은 자기 욕망을 위해 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실하고 충성된 사람의 기도는 모두 이루어집니다. "내가 믿는다"고 말할 때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믿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자기 욕망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포장하여, 그것을 믿음이라 믿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의 은사를 받아야 하나님의 말씀에 더 신실해져서 말씀 자체를 믿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면서 말씀 속에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충성이라는 단어의 한자를 머릿속에 그려 보십시오. '忠'(충)은 '中'(가운데 중)과 '心'(마음 심), 곧 '중심'입니다. '誠'(성)은 '言'(말씀 언)과 '成'(이룰 성)으로, '말씀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충성은 '중심을 다하여 말씀을 이루는 삶'임을 알게 됩니다. 평소에는 말씀과 상관없이 살면서 주일에 교회에서만 열심히 봉사하는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자기만족입니다. 하기 싫고 자기만족이 없더라도 중심으로 말씀을 이루기 위해 울면서도 행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통해 주님게서 역사하십니다. 그와 같은 믿음의 은사는,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님께서 채워 주십니다.
이재철, 「성숙자반」p.328
어떤 목사님이 미국 여행 후에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어느 교인 댁에 머물렀는데, 어느 날 그 부부와 파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남편 집사님은 사무실에서 파티 장소로 바로 가고, 목사님은 부인 집사님과 가기 위해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집사님이 정장을 하고 나왔는데, 집사님의 목에서 멋진 목걸이가 번쩍거렸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농담한다고 던진 말이, "그 목걸이 꼭 진짜 같으네요"였습니다. 이 말이 입에서 나가는 순간, 목사님은 실수했다 싶었습니다. 진짜 같다는 말은 그 목걸이가 가짜라는 의미이기에, 당사자로서는 얼마나 기분이 언짢겠습니까? 그런데 뜻밖에도 그 집사님이 까르르 웃었습니다. "목사님, 이게 가짜인지 어떻게 아셨어요?" 하면서 말입니다. 집사님은 진짜 보석은 집에 두고, 외출할 때는 주로 모조품을 착용한다고 했습니다. 집사님의 말에 목사님은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진짜를 가진 사람은 상처 받지 않는구나.'
부자에게 가난뱅이라고 해도 부자는 상처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말 가난한 사람에게 가난뱅이라고 하면 깊이 상처 받습니다. 박사를 박사인 줄 모르는 사람이 무식꾼이라 하면 박사는 웃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초등학교도 안 나온 사람에게 무식꾼이라 하면 크게 상처 받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상처 받는 그리스도인은 아직 성숙한 믿음의 소유자가 아닙니다. 내 안에 보배이신 주님이 계심을 깨닫는다면 도대체 이 세상 누가, 무슨 말이 내게 상처를 줄 수 있겠습니까?
이재철,「성숙자반」p.25
"도대체 뭘 믿어야 합니까?"하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수님이 당신이 생각하는 그 분이란 사실을 믿는 것 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님이 스스로에 대해 주장하신 내용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유진 피터슨-최고의 설교」p.57
예수님의 부활이 에노스(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간)에게 생명의 길을 터 주었다면, 에노스에게 예수 부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증거는 과연 무엇인가? 무슨 증거로 예수 부활을 믿고 또 전할 수 있단 말인가?
첫째, 우리 믿음의 대상인 성경이 예수 부활을 확고히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객관적 증거가 될 수 없다. 성경을 믿지 않는 자는 성경이 전하는 예수 부활 자체를 아예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 부활의 증거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까지 설득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성경 밖의 증거가 있어야 한다.
둘째,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새로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것은 2천 년 전 의 일이다. 그런데도 지난 2천 년 동안 지구상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참 생명을 얻고 삶이 새로워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오늘도 살아 역사하신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불충분하다. 불교신자들 역시 2천5백 년 전에 이땅을 거쳐 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새로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예수님에겐 무덤이 없다는 것이 부활의 증거다. 어떤 종교든 교주의 무덤을 갖고 있다. 교주 무덤의 크기가 자기 종교의 권위를 나타내기라도 한다는 듯, 각 종교는 왕릉 같은 교주 무덤의 규모와 위용을 자랑한다. 만약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우리는 이스라엘 어딘가에서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온 정성을 다해 조성한 예수님의 거대한 무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에겐 아예 무덤이 없다. 부활하신 예수님께는 무덤의 핵인 시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확실히 예수 부활의 좋은 증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 역시 불충분하다. 예수님을 대적하던 자들은 이미 2천 년 전부터 예수님의 제자들이 스승의 시신을 어디론가 빼돌린 뒤 거짓말을 한다고 퍼트렸기 때문이다.(마 28:11-15). 무언가 확고부동한 증거가 따로 있어야만 한다.
그 확고한 증거는, 제자들에 의한 예수 부활의 증언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닉슨 전 미국대통령의 특별고문이었던 찰스 코슨은 자신의 저서 <러빙 갓>에서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1972년 워싱턴 소재 워터게이트 건물 안에 있던 민주당 사무실에 절도범이 들었다. 대수롭지 않은 단순 절도 사건처럼 보였지만, 절도범 중 한 사람의 주머니 안에서 백악관 직원의 이름이 적힌 쪽지가 발견되어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워터게이트의 망령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확대되기만 했다. 마침내 1973년 3월 21일 대통령의 보좌관들이 모여, 닉슨 대통령은 애초 사건 자체를 알지 못했다는 조직적인 사건 은폐 음모를 꾸몄다. 그 음모에 참여한 10여 명의 보좌관들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들로서 미국에서 최고의 명성을 날리던 변호사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법률 전문가들이었기에 어떻게 해야 사건을 완벽하게 은폐할 수 있고, 어떻게 진술해야 철저하게 은폐를 유지할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는 불과 18일 만에 무참하게 무산되고 말았다. 그토록 말을 맞추었음에도 집요한 검사의 심문 앞에서 그들의 진술이 엇갈린 것이다. 그들은 죽음의 위협에 처하지도 않았다. 누가 무력으로 협박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진술은 엇갈렸고, 마침내는 닉슨 대통령에게 등을 돌린 채 막강했던 권력의 자리를 포기하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그들이 지키려고 했던 것이 거짓이었기 때문이다. 거짓은 어떤 시도로도 지켜지지 않는다. 거짓은 반드시 허물어지고 만다. 거짓이란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 최고의 엘리트들이 꾸민 거짓이 18일을 넘기지 못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만약 예수 부활의 증언이 제자들에 의해 꾸며진 거짓이라면, 그 거짓은 이미 2천 년 전에 공중분해되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지성인도, 법률 전문가도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무식꾼이었다. 그 무식꾼들이 아무리 입을 맞춘들, 그들이 꾸민 거짓말이 지켜질 리가 없다. 더욱이 예수 부활을 증언하는 대가로 그들에게 세상의 권세나 영광이 주어진 것도 아니다. 그 대가는 원형극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거나 참수형, 혹은 화형을 당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전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 예수 부활을 외치면서 죽어 갔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진짜로 만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무식한 제자들의 증언은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허물어지지 않고 우리에게까지 전해졌다. 예수님께서 정말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매듭짓기」p.37
매일의 삶 속에서 순간순간 결단의 기로에 서게 될 때 비로소 참된 믿음이 드러납니다. 믿음은 내일과 또 다음날까지도 매일매일 새롭게 승리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루를 살아갈 만큼의 믿음을 주시기에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일용할 양식과도 같습니다.
- 디트리히 본 회퍼
믿음은 단발적인 행사가 아니라 지속적인 삶입니다. 믿음은 점이 아니라 선입니다. 누가복음 18장 1절부터 8절 상반절을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 이야기가 나옵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 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여기까지는 무슨 말씀입니까? 기도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가 계속 찾아가서 사정하면 들어주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억울한 일을 풀어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정작 하시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 다음입니다. 그 다음 내용이 무슨 접속사로 시작합니까? ‘그러나’입니다. ‘그러나’이후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그러나’의 뒤에 도는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그 앞부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나’뒤에 오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18:8하).
1절부터 8절 상반절까지는 한 번도 믿음이라는 단어를 쓰시지 않았습니다. 아쉬운 일이 있어서 하나님에게 매달리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합니다. 부교 신자도 아쉬운 일이 있으면 우리보다 더 열심히 목탁 치고 기도합니다. 무당을 찾는 사람도 우리보다 더 많이 돈 내고 열심히 굿합니다. 이처럼 아쉬운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을 붙드는 것은 누구나 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그것을 참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말씀을 이제까지 배운 것으로 표현해 보면 어떻게 됩니까? ‘네가 원치 않는 상황 속에 빠져도, 네 계획이 어그러져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을 갖겠느냐? 하나님을 향해 네 시선을 고정시키겠느냐? 그 상황에서도 신실해지겠느냐? 그 상황에서도 네 믿음이 남에게 보이겠느냐? 그 상황에서도 너 자신을 가꾸겠느냐? 그 상황에서도 네가 정말 자유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겠느냐?’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아쉬울 때 내 욕망과 필요함을 위해 주님을 찾는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너희 천부께서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미리 아신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아이가 꼭 젖 달라고 해야 엄마가 젖을 줍니까? 때가 되면 다 주지 않습니까? 하루 세끼 아이들이 꼭 밥을 달라고 해야 밥을 주는 부모는 참된 부모가 아닙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 가운데 정말 귀한 것은 하나도 구하지 않고 얻었습니다. 우리가 숨쉬는 공기를 매일 아침 기도하고 ‘믿습니다’해서 얻습니까? 우리가 기도해서 하늘의 태양이 곡물을 여물게 합니까? 우리가 기도해서 이른비나 늦은 비가 내립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생명과 직결되는 것은 하나도 기도하지 않고 얻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지금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없어도 되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없어도 무관한 것들을 위해서 목숨 걸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내 삶 자체가 신아이 되도록, 내 믿음이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바로 그 때, 우리는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때, 우리는 신앙과 삶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중적인 삶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갈 때, 이 세상을 떠나는 날 후회 없이 떠날 수 있을 뿐 아니라 내가 이 세상을 떠난 뒤에 나의 삶 자체가 자식을 위한 가장 위대한 유산으로 남게 됩니다.
이재철 목사 「회복의 신앙」 p.179
믿음이란 주님의 말씀과 주어진 상황에 대한 순종이라는 사실은 이미 우리가 배웠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 조건이 따릅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는 까닭은 먼저 주님의 인격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온전하신 인격을 믿기에 우리는 그분의 말씀은 온전히 믿을 수 있고, 그분에 의해 주어지는 모든 상황에 순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른 믿음이란 주님의 인격에 나의 인격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만약 누구든 바른 믿음으로 자신의 인격을 주님의 인격에 송두리째 맡긴다면, 믿음의 연륜이 쌓일수록 그의 인격은 반드시 주님의 인격에 동화되게 됩니다. 이처럼 한 인간의 인격이 주님의 인격에 동화되는 믿음, 이것이 바른 믿음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교회생활을 아무리 오래 했을지라도 주님의 인격에 자신의 인격이 동화되지 않는다면 그의 믿음은 바른 믿음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밤이 되면 TV뉴스를 시청합니다. 앵커가 보도하는 온갖 뉴스의 내용을 시청자들은 대부분 그대로 믿고 받아들입니다. 그 때의 믿음이란 TV 방송사의 공신력에 대한 믿음이지 앵커 개인의 인격에 대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시청자가 앵커가 전하는 뉴스의 내용을 믿는다고 해서 앵커의 인격에 자신의 인격마저 맡기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 밤 한 시간씩 똑같은 앵커의 뉴스를 시청할지라도 그 앵커의 인격이 시청자의 인격을 변화시키지는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믿는다면서도 주님의 인격에 우리의 인격을 맡기지 못한다면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TV 앵커와 시청자의 관계와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이재철 「요한과 더불어」2
사탄이 사람을 유혹할 때 즐겨 쓰는 세 가지 문장이 있다고 한다.
'딱 한 번만이야, 두 번도 아니고 딱 한번이라니까!'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시는 안 해도 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하는 거야!'
이렇게 해서도 성공을 거두지 못할 경우, 사탄은 마지막 비장의 무기를 꺼낸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는데 뭘 그래? 자 보라구! 다 그렇게들 하고 있잖아!'
사탄의 마지막 유혹은 세상의 풍조를 따르라는 것이다. 따라서 크리스천이라면 이러한 유혹을 단호히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초등학생 70퍼센트 이상이 이 사회에서는 정직하게 살 수 없다고 응답할 정도로 불의와 거짓이 일상사가 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 풍조를 거스를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아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은 사람이라면, 물거품 같은 그 허망한 풍조를 따라 나설 까닭이 없다.
이재철「청년아 울더라도 뿌려야 한다」p.152
전 세계적으로 한국 이민자들이 밀집해서 사는 지역은 몇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첫 번째로 학군이 좋고, 두 번째로 주로 새 집이 많은 개발지들이고, 세 번째로 땅 값이 오를 가능성이 높은 지역들이다. 전 세계 어디를 가든 한국 사람들을 그런 지역을 찾아서 정착한다.
그런데 우리가 살 지역을 선택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떠나보낸다. 그가 부름 받은 가나안 땅은 그 당시 농업 생상력이 떨어지는 황량한 땅이었다. 당시 돈을 벌려면 농업 생산량이 높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가든지 지금의 이집트 지역인 애굽으로 가야 했다. 가나안 땅은 산지와 광야가 많았고 물이 부족했다.
가나안이란 이름의 유래를 보면 그 땅의 성격을 알 수 있다. 노아의 아들들 중 함이 아버지인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것을 보고 비웃었다. 그 결과 노아의 저주가 함에게 임하는데 함의 아들들 중 한 며인 가나안에게 임한다. 저주 받은 사람들이 모여 살던 땅을 가나안 땅이라 불렀다. 즉, 당시의 가나안 땅은 저주받은 자들의 땅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너에게 복을 줄게. 그 복을 가지고 저주받은 사람들의 땅으로 가라."
하나님은 어디에 복 있는지 관찰해서 복 있는 지역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네게 복을 줄 터이니 네가 복의 근원이 되어 그 땅을 복되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이용규 선교사, 「떠남」p.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