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 이야기/BIBLE

기도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말로 기도를 끝냅니다. 우리 같은 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직접 기도드릴 수 없기에 예수님의 이름을 빌려서 기도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끝내기만 하면 무슨 기도든 다 이루어 주신다는 의미입니까? 예수님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구하라고 하신 말씀이 그런 의미이겠습니까?

 가령 제 아들이 동네 가게에 가서 "제 아버지 이재철 목사 이름으로 달아 놓고 소주 열 병 주세요"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는 서점에 가서 "제가 지금 돈을 안 가지고 왔는데, 제 아버지 이재철 목사 이름으로 달아 놓고 성경 한 권만 주세요"라고 할 수는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에 맞는 것을 구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할 수 없는 것을 구하지 않는 것, 그것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계명의 정신입니다.

 이 계명에서 '말라'라는 단어를 '하라'로 바꾸어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하라'는 의미임을 알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늘 존귀하게 하면 망령되게 부를 까닭이 없습니다. 내가 누군가의 이름을 존귀하게 한다는 것은 그와 나 사이에 신실한 관게가 맺어져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재철,「성숙자반」p.242


기도할 때 아주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미혼의 청년들에게 원하는 배우자의 용모, 키, 학벌, 직업 등을 구체적으로 기도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참 위험합니다. 가끔 자신이 기도한 대로 배우자를 주셨다고 간증하는 사람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 당사자가 행복하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 기도는 상대의 외적 조건에 국한되어 있으므로 상대의 내면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외적 조건이 아니라, 배우자의 인품과 성품입니다. 결혼이란 두 사람이 한 인생을 사는 것인데, 그것이 가능하기 위한 토대가 바르고 성숙한 인품과 성품입니다. 그러므로 외적 조건을 중시하는 기도를 통해 바른 배우자를 만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절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배우자든 자식이든 사람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팅이 끝난 보석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원석을 주십니다. 그 원석의 가치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철저하게 열려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자기중심적인 틀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아무리 귀한 원석을 주셔도 그 가치를 알지 못해 버려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나 자신이 날로 확장되어 갈 때에만,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면이 상대에게 있어도 그의 속사람, 즉 원석의 가치를 알아 가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내가 만든 틀 속에 갇히시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나의 틀을 깨어 가야 합니다.

이재철,「성숙자반」p.35


광철 씨가 늦게야 내려왔다.

 수요예배를 마치고 집사님 두 분과 얘기 나누고 있을 때 광철 씨가 교회마당으로 들어온 것이다. 꽃과 비닐봉지가 손에 들려 있었다. 꽃은 그날 일한 집에서 얻어온 것이고, 비닐봉지 안에 있는 호박은 집에서 따 왔단다.

 늦었으니 얼른 돌아가라는 집사님의 말에 그래도 왔으니 기도나 하고 간다는 광철 씨는 예배당으로 들어간다. 제단 불을 켜고 가져온 꽃을 꽂는 사이 광철 씨는 마루 뒷쪽에 무릎꿇고 앉아 나즈막한 소리로 기도를 드렸다. 더듬더듬 기도가 이어졌다.


 "하나님. 일하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농사철이 되어서 으트케 바쁜지 죄송합니다.

 전도사 사모님 건강하시고 소리도 건강하시고 저는 가진 게 없어 헌금도 못 내고 죄송합니다.

 그래서 오늘 꽃하구 호박 가져왔습니다."


 죄송한 것 뿐인 사람. 모든 게 죄송할 뿐인 사람. 문득 떠오르는 세리의 기도.


 한의철, 「작은 교회 이야기」


 성경과 더불어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읽고 있었다. 알다시피 글쓴이는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어울려 살며 복음을 선포했던 신실한 선교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에는, 능력이 턱없이 부족해서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다는 자의식에 눌리곤 했던 것이다. 브레이너드를 본받아 똑같은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주님, 거룩한 뜻을 위해 지금 됨됨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존재로 날 변화시켜 주소서"

 충성스러운 선교사에게 배운 대로, 담임목사 청빙 과정뿐만 아니라 실제로 브룩힐즈교회에 부임해서 수많은 성도들을 이끌고 있는 지금까지도 같은 기도를 드린다.

데이비드 플랫,「래디컬 투게더」p.77


중보기도란 개인과 공동체가 날마다 스스로를 정화하기 위하여 반드시 해야 하는 목욕과 같은 것이다.

디트리히 본 회퍼


 우리는 성령의 도움 없이는 기도의 문제를 알지 못한다. '성령의 도움' 없이는 기도에 대한 방법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덧붙여 말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과는 달리 영적인 책임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 힘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존 번연,「하늘 문을 여는 기도」p.37


 하나님 앞에서 영혼을 쏟아부으려고 할 때 어떠한 말을 할까 고민하는가? 그것은 당신이 하나님 앞에 어떤 세련된 스타일의 기도를 가지고 나가지 않으면 하나님이 당신을 생각하지 않으실거라는 걱정 때문이다. 그 분의 눈동자는 당신 마음의 비탄을 향하고 있다. 그 슬픔은 하나님의 자비를 불러온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자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당신이 말을 멈출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당신의 가슴속에 너무 많은 고통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존 번연,「하늘 문을 여는 기도」p.98


 우리 안에서 끓어오르는 온갖 욕망의 소리를 질러대면서 어떻게 진리이신 주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욕망의 함성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격리시켜야 합니다.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진리시요 진리의 영이십니다. 진리와 영의 소리는, 인간 욕망의 함성 속에서는 결코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입을 굳게 다물 때, 우리 욕망의 소리를 내려놓을 때, 진리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산이 터지고 땅이 흔들리는 지진이나 맹렬한 불로, 혹은 거친 바람소리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할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가 그의 입을 굳게 다물고 자신의 소리를 내려놓지 않고서는 절대로 들을 수 없는 음성이었습니다.

이재철,「비전의 사람」p.128


 ‘이판사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이 말은 본래 불교의 이판승과 사판승을 가리키는 것으로뒤에 그 경계가 없어지게 됨으로써 뜻이 변하여 어떤 이링 뒤죽박죽 엉망이 되었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사판은 요즘 말로 표현하면 행정승을 의미합니다살림과 행정을 도맡아 하는 사람입니다. ‘이판은 수도승을 의미합니다불경 연구와 참선에만 열중하는 사람입니다불교가 썩었다고 할 때에는 사판들이 썩는 경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조계종에 가서 각목 들고 싸우는 사람은 사판입니다그러나 불교에는 아직도 이판이 있습니다성철 스님처럼 평생을 산 속에서 살면서 불교의 진리를 구현하는 분들이 계시는 것입니다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사판들이 아무리 싸우고 진흙탕 짓을 해도 국민들이 불교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믿는 바가 있습니다.

 구교에도 이판사판이 있습니다바로 신부로 불리는 사람들입니다예를 들면 교황추기경주교주임신부 등은 모두 불교에서 말하는 사판들입니다이판은 수도원의 수도사들입니다가톨릭에서 부패한 사람들은 시판들이었습니다물론 타락한 수도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이판들은 언제나 이판으로 건재했습니다그래서 사판들이 그토록 부패해도 구교가 지키고자 하는 본질은 살아남은 것입니다.

 구교의 수도사들이든지 불교의 수도승들이든지이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공통점은 침묵의 법을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진리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오늘 이 시대의 이 시점에 진리가 내게 요구하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그들은 입을 다무는 법을 훈련합니다.

16세기 초 종교개혁 이후에 개신교에서는 이판을 두지 않았습니다그래서 개신교에는 수도사라는 것이 없습니다왜 개혁자들이 개신교에 수도사를 두려 하지 않았는지는 문헌을 아무리 뒤져도 나타나지 않습니다저는 좋게 해석합니다이판과 사판은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존재해야 된다고 개혁자들은 믿었기 때문에 구별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일어난지 5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면서 전세계의 프로테스탄트 교인들에게 침묵은 사라졌습니다그래서 어느 나라를 가든지 개신교도들은 말이 많은 사람으로 되어 있습니다긍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부정적인 의미에서 그렇습니다구교의 수도사들의 볼 때프로테스탄트들이 하는 말은 마치 속이 빈깡통 소리처럼 들립니다진리를 위한 침묵이 배어 있지 않는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듣는 법을 훈련해야 합니다물론 소리내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합니다우리는 하나님도와주십시오” 하며 땅을 치고 울 수 있어야 합니다그러나 내가 울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을 하나님께서 왜 주셨는지내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무릎 끓고 침묵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엘리야가 호렙 산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주셨습니다.(왕상19). 그것은 곧 우리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엘리야야내가 이제부터 너에게 말할 테니 너는 들어라.”

 엘리야가 귀를 세웠습니다폭풍이 불었습니다얼마나 큰바람이었던지 부는 순간에 바위가 쪼개어졌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 속에 없었습니다지진이 일어났습니다온 땅이 뒤흔들렸습니다그러나 그 속에도 역시 하나님 말씀은 없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폭풍처럼 우렁차게지진처럼 요란하게불처럼 현란하게 날마다 임한다면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할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아무소리가 들리지 않는 적막 가운데서 세미하게 들려 왔습니다진리는 세상의 요란함 속에서 들리지 않습니다진리는 인간의 소란함 속에서 포착되지 않습니다진리는 정적 속에서만고요 속에서만 들립니다그래서 침묵의 깊이만큼 우리의 영성은 깊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재철,「회복의 신앙」p.113


 지금 시계는 45억의 인구가 그리스도 없이 살고 있으며 10억이 넘는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는가? 예수님은 마태복음 9장에서 그 해답을 제시하셨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 9:36-38).

 놀랐는가? 처음 이 본문을 대했을 때 난 두 가지 점에서 깜작 놀랐다. 우선 병들고, 가난하고, 갖가지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둘러싸인 예수님이 즉시 제자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리시지 않았다는 점이다. "베드로야, 너는 저 남자한테 가 봐라! 요한, 너는 저 젊은이를 돌보고! 안드레야, 넌 저쪽으로!" 하지만 주님은 그러지 않으셨다. 대신 그 어떤 행동보다도 먼저 기도하라고 명령하셨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주신 기도의 내용이다. 개인적으로는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리라고 예상했다. "도움을 청하는 백성들을 보아라. 추수할 것이 참 많구나. 그러므로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진 이들을 위해 기도해라. 먼저 저 사람들을 위해 간구하여라." 그러나 이번에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무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데이비드 플랫,「래디컬」p.245


 "기복기도 하지 말라"는 말은, 본인이 노력하지 않으면서 미신적으로 복만 빌지 말라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서는 그 말을 "세속적인 일을 위해서는 아예 기도하지 말라"는 말로 소화하고 있기도 하다.

 복을 구하는 일이 잘못인가? 아니다. 성경은 온통 축복의 약속으로 채워져 있고, 축복을 청하는 기도로 가득하다. 야베스의 기도를 보라.

 야베스는 정해진 무엇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다만 무엇이든 주어진 대로 누리고자 했다. 그리고 야베스는 자신이 구한 복을 자신이 제한되게 생각하여 모두 누리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든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지경, 자신의 시선을 넓혀 달라고 간구했다. 야베스는 그 넓어진 지경이 자신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음을 겸손하게 시인하며 주의 손길을 구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믿었다. 주의 손길이 재앙속에서만 지켜주실 것이 아니라 재앙 자체에서도 지켜주실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차동엽, 「무지개 원리」


 부모가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데 놓치지 말아야 할 기도가 있다. 자녀의 비전을 위한 기도이다. 자녀의 사교육을 위해 돈을 쏟아 붓는 것보다 더 우선적이 것이 있다. 바로 자녀가 하나님 안에서 비전을 갖도록 애절하게 기도하는 것이다. 자녀의 앞날을 위해 욕심을 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과제는 자녀의 소명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것이다.

 윌리엄 캐리라는 소년이 있었다. 그는 구두 수선공이었다. 그는 하루하루를 아무런 소망도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자 그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확 달라졌다. 그에게 꿈이 생겼다. 그는 수선 가게 자기 자리 앞에다 세계 지도와 세 가지 표어를 적은 종이를 붙여놓았다. 첫째, 큰 비전을 가져라. 둘째, 큰 기도를 하라. 셋째, 큰 기대를 걸라. 꿈을 품고 기도하는 그에게 하루하루는 큰 기쁨이었다.

 남의 구두 수선 가게에서 수선이나 하는 사람이 꿈을 품어봤자 수선 가게 하나 차리는 정도가 아닐까? 그러나 윌리엄 캐리의 꿈은 전혀 달랐다. 그는 세계를 가슴에 넣었다. 아무도 외국에 선교사로 나가는 것을 꿈조차 꾸지 않을 그때, 윌리엄 캐리는 선교사로 나가겠다고 자원했다.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비웃었다. 후원자도 없었다. 아내까지도 반대했다. 그러나 그는 인도로 뛰어 들었다. 훗날 그는 세계 선교의 아버지가 되었다.

 당신의 자녀는 비전을 가져야 한다. 비전을 발견한 자녀는 공부해야 할 이유를 알게 된다. 강요에 의한 공부가 아니라 스스로 공부하게 된다. 왜냐하면 달려가야 할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성취해야 할 비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부모는 자녀의 비전을 위해 눈물로 기도해야 한다.

 그런데 부모가 자녀의 비전을 위해 기도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부모의 욕심을 채우려는 기도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정욕으로 쓰려고 구하는 기도는 응답을 얻지 못한다고 단정 지어 말한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2-3)

김병태,「기도하는 자녀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p.102


마태복음 6장 8절에서 9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그러므로에 밑줄을 긋고 주목해 보십시오성경에서 그러므로’ 같은 단어가 나오면 대단히 주의해서 보아야 합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먼저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그러므로무엇을 말씀하고 계십니까?“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6:9)고 하십니다그러면서 새로운 주님의기도’, 즉 주기도문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먼저 알고 계시고 책임져 주시는 분이시므로 믿음의 성숙을 꾀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의 기도를 별 생각 없이 되뇌입니다그러나 주님의 기도는 새로운 성숙한 삶에 대한 신앙고백이요 결단의 기도입니다주님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6:9)

이 기도문은 수동태입니다하나님의 이름이 누구에 의해서 거룩히 여김을 받습니까바로 나 자신입니다즉 이 기도는 하나님나의 삶에 의해서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되기를 바랍니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아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6:10).

 이것은 나의 삶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는 기도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96:11).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일용할 양식을 없어서 죽는 사람들의 비율은 미미합니다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십니다기도하지 않으면 일용할 양식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겠습니까그렇지 않습니다이것은 일용할 양식만으로도 자족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결단더 이상 욕망의 노예가 도지 않겠다는 결단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6:12).

이것은 이제부터 용서의 삶을 살겠다는 결단의 기도입니다그처럼 성숙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동기가 무엇입니까아버지께서 내게 있어야 할 것을 미리 아시고 책임져 주시는 분이시므로이제부터 그분의 뜻을 위하여 내 삶을 바쳐 드리는 성숙의 단계로 접어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이재철,「회복의 신앙」p.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