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19일기(13.8.29 공개)
새로 옮긴 숙소에 인터넷을 설치했다. 늦여름부터 리모델링 공사 때문에 훈련병 막사에서 지냈는데, 드디어 공사가 모두 끝나고 짐을 모두 옮기고 내 집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직은 휑한 벽과 창문이 어색하고, 바닥에는 닦고 쓸어도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 흙먼지가 밟혀서 촉감이 이상하다.
집 같지 않은 곳에서 100일 가까이 지냈지만, 나름대로 좋은 점도 많았던 것 같다. 퇴근하면 항상 자기 방으로 돌아가는 동기들을 한 방에서 다 볼 수 있다는 게 그렇게 즐거운 일이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평소에 좀처럼 보이지 않아 친해지지 못했던 동기들과도 많이 친해지고, 원래 친했던 동기들과도 더 가까워졌다. 그리고 어느때보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나에게 정말 친구들이 많은 힘이 되어 준 것 같다. 예전처럼 출근해도 즐겁고 퇴근해도 즐거운 시절을 보내고 싶었지만, 이제는 쉽지 않은 것 같다.
토요일 하루 양 손에 짐을 들고 스물대여섯 번을 왔다갔다 한 끝에 짐을 모두 옮기고 지금 이 방에 와 있다. 이제 퇴근해도 나를 반겨 줄 친구도 없고, 수고했다고 내가 말해 줄 친구도 없다. 같이 사는 후배는 막사에 있을 때와 같이 좀처럼 퇴근을 하지 않는다. 어제는 새벽 2시에 간부연구실 의자에서 자고 있는 걸 데려왔는데, 새벽같이 사라졌다. 그동안 막사에서의 모습을 볼 때 내가 싫어서는 아니라는 생각 + 대인기피증이 확실하다는 생각이 교차했다. 아무튼 농담삼아 '이 집에 우리 둘이 배정받으면 난 혼자 사는 꼴이다'라고 했던 말이 현실이 됐다.(그 말 때문에 진짜 안 들어올 가능성도 충분하다...)
전역이 6월인데, 얼마 안 남은 것 같기도 하고 까마득히 먼 이야기 같기도 하고 이상하다. 지금 나는 잘 하고 있을까? 얻은 것과 잃은 것을 대조해보면 얼마나 나올지 궁금하다.
혼자서 모든 사람들을 안고 데려갈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그리고 군대에서는 그 길이 더 아득하게 느껴진다는 것도 알지만,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인데 왜이리 변화시키기가 힘들까? 내가 원하는 건 그저 우리 중대를 스쳐가는 모든 사람들이 '군 생활 뿌듯하게 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이 되길 바랄 뿐이었는데, 지금은 다들 내게 와서 하소연하는 말이 '우리는 그냥 소모품밖에 안 되는 것 같습니다'라는 말이다. 내가 절대 듣고 싶지 않은 말을 하게 만든 사람들. 일이 아무리 많아도, 힘들어도 서로 신뢰하고 아껴 준다는 것만 느낀다면 사람들은 힘을 잃지 않을텐데. 열심히 할 때는 채찍질하고 열심히 안 할 때는 욕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 가운데서 버팀목이 되어 주던 내가 지쳐가는 모습을 보이니까 다들 나를 위로해준다. 자기들이야 나한테 오면 이해해 주지만, 나는 어디 하소연 할 곳도 없지 않냐고 한다. 그게 사실이라 더 슬프다.
하루를 끝내고 크게 숨을 내쉬고 나면 이곳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저녁 9시 이후로는 돌아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는 이곳. 우리나라에서 가장 별이 많이 보이고 공기 좋은 이곳. 모든 소음을 떠나 바라보는 이곳의 풍경은 정말 아름답다. 그리고 젊은, 어린 나이에 오기 싫은 곳에서 열정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모습들도 아름답다. 배울 점도 정말 많다. 잠깐 쥐고 있는 권력 때문에 이 사람들이 내 아래라고 착각하며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선이 한창이다. 개표는 80%가 넘어섰고 당선자는 정해진 것 같다. 부재자투표를 하러 가는 길에야 '아, 나 투표하러 가는 길이었지?'라는 생각을 하고 홍보물이 들어간 봉투를 뜯어 본 나로서는, 둘 중에 누가 되든 나라 말아먹을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가 됐든 국민의 반 이상이 선택한 사람이고, 다른 반절의 국민을 껴안고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래 얼마 되지도 않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는 사람도 그 권력을 놓지 못하는데,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어떨까? 정말 모두를 안고 가기 힘든 자리일 것 같다.
주식하다 말아먹는 사람들 대부분은 자기 생각과 주가가 같이 움직이지 않으면 주식을 욕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 다시 도전하고, 자기 돈과 자신이 틀렸다는 생각 두 가지를 또 까먹는다.
정치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내가 원하는 후보가 됐든, 되지 않았든 결국 내가 결과에 맞춰 가야 한다는 걸 안다면 불행하지 않을 거라 믿는다.
차악은 내가 찍은 후보가 당선된 뒤 엉망으로 했을 때, 나를 도와주지 않았을 때 '저 사람이 변했다'라고 말하는 것, 그리고 내가 찍은 후보가 당선되지 않았을 때 '이 나라는 망했다'라고 하는 사람들이다. 언제든 선거 표심은 반반에 가깝고, 국민의 반이 망했다는 생각을 가진 나라라면 이 나라는 진작에 망했을 거다. 그게 아니니까 여태까지 잘 살아왔겠지.
제일 최악은 편가르기.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것들이, 또는 현실을 모르는 늙은이들이 투표권을 가지니까 이렇게 됐다는,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발언을 하는 사람들이다. 갓 스물이 되어 투표한 사람도 국민이고, 100살 넘어 투표한 사람도 국민이다. 그리고 그 모든 국민의 뜻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길로 갔다면 그 나라는 망하는 게 맞을 거다. 군대도 요즘 군대 엉망이다 이래서 되겠냐는 말을 들으면서도 변화한다. 국민이 잘못 알고 있다고 군대 맘대로 하면 그건 국군이 아니다.
누가 되든, 반대 성향의 국민들의 뜻을 완전히 무시하고 일을 추진할 수는 없고, 결국 양측이 모두 원하는 방향부터 이 나라를 바꿔나갈 것이다. 서로 '이건 아닌데....'라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사로 시작해서 대선으로 끝난 오늘 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