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교회 건물이 없기에 은혜로운 예배와 설교를 놓고 사모하며 기도했다. 화려한 행사나 이벤트가 아니라 오직 예배로 승부 거는 교회가 되기를 꿈꾸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처럼 열악한 상황과 조건에도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말 참된 예배자로 마음을 다할 때, 온전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세움 받을 때 그것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같은 영적 원리를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예배를 잘 드릴 때 인생의 회복이 일어날 줄 믿는다. 예배를 잘 드릴 때 어긋난 가정이 주님 앞에 회복되어 기쁨으로 영광을 돌리는 일이 일어날 줄 믿는다.
이찬수, 「오늘을 견뎌라」p.145
가정예배
형식과 자세보다는 내용과 과정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가정예배가 자연스럽고 즐거우며 자녀들이 기다리는 가족 활동이 되기도 전에 자녀들의 자세와 태도를 고쳐주려는 일에 초점을 맞추다보면 부모와 자녀 모두에게 불만스러운 결과가 초래되기 쉽다.
「내 아이의 미래를 결정하는 가정원칙」p.227
무대에 서기 적합한 인물들만 뽑아서 구성한 멋진 퍼포먼스에 기대지 않으면 교회는 어떻게 될까? 퍼포먼스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고방식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분명히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함께 모여 하나님의 예배하라고 가르친다(히 10:24-25). 재론의 여지가 없는 진리지만 반드시 흔히 생각하는 방신을 좇아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교회의 존재 자체가 불법으로 규정된 나라의 그리스도인을 떠올려 보자. 온 마을 주민들이 모두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밤중에 살그머니 집을 나서야 한다. 칠흑 같은 어둠에 몸을 숨기고 정적에 빠진 마을 길을 굽이굽이 돌아 나간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혹시 누가 따라오지 않나 살피고 또 살핀다. 자신을 포함해서 성도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붙잡히면 두 번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 아니, 영원히 밝은 빛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마침내 어느 골목으로 접어든다. 조그만 집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온다. 아무도 미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다음, 소리 없이 집 안으로 들어간다. 똑같은 경로를 거쳐 모인 몇몇 동료들이 숨죽여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피곤한 기색과 기대감에 부푼 표정이 뒤섞인 그들 얼굴을 보면, 금방 알게 될 것이다. 거기 앉은 형제자매들 가운데 1년 내내 강의 요청이 쇄도하는 명강사의 이야기를 들으려 찾아온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실력 있는 밴드의 연주를 감상하러 온 것도 아니다. 너나없이 그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하고 싶어서 목숨을 걸고 모여든 것이다.
퍼포먼스 따위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오직 사람뿐이다.
「래디컬 투게더」p.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