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되기 전날 밤이었다. 당신의 백성을 놓아주지 않으려는 이집트를 징벌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집트 전역에서 사람의 장자와 짐승의 첫 새끼를 진멸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은 지켜 주시기 위하여 그들로 하여금 양을 잡아 그 피를 문 인방과 설주에 발라 두게 하셨다.
양의 피를 발라 두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피가 보이는 집을 '뛰어넘으시므로' 그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날을 '유월절'이라 불렀다. 문제 그대로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심판이 '뛰어넘어 갔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유월절을 영어로도 '패스오버'라 한다.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패스오버 하게 되었는가? 하나님께서 문에 발라져 있는 양의 피를 보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양이 죽었기 때문이다. 양이 사람을 대신하여 피를 흘리고 죽었기에 하나님의 심판은 패스오버 되었고 그 결과 사람이 산 것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드려지던 제사의 본질적 의미가 이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기에 결코 죄를 용납하시지 않는다. 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이 따랐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죄를 범했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양을 잡아 제사를 드렸다. 이른바 속죄양이었다. 죄의 형벌을 받아야 할 인간을 대신하여 양을 잡아 피를 뿌리면, 그 피를 보신 하나님의 심판은 패스오버 되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제사는 완전한 제사일 수 없었다. 인간의 죄를 대신하는 제물이 짐승이라 불완전한 제물일 수밖에 없었고,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 역시 불완전한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를 범할 때마다 양을 잡고 피를 뿌리면서도 본질적인 죄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것이 인간이 짐승으로 드리는 제사의 한계였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본질적인 죄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친히 영원한 제사를 마련해 주셨다. 바로 십자가였다. 그 십자가에서 드려지는 제물은 더 이상 불완전한 짐승이 아니었다. 흠 없고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제물이었다. 완전한 제물이었다. 그 제사를 하나님께 바쳐 드리는 제사장 또한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셨다. 완전한 제사장에 완전한 제물, 그야말로 완전한 제사였다.
짐승으로 드리는 제사의 효력은 언제나 일회적일 수밖에 없었다. 제물로 바쳐진 짐승이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다음 제사 때는 새로운 제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제물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깨뜨리고 영원히 부활하셨기에, 그분이 드린 제사의 효력 또한 영원해졌다. 주님께서 친히 제물 되신 십자가의 제사가 완전한 제사임과 동시에 영원한 제사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제사를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어져 버렸다.
그러므로 이제 인간에게 남은 것이 있다면, 인간의 죄를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사하여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제물 삼아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드려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뿐이다.
여기서 그대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보겠다.
그대는 구원받았는가?
그대는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
그대가 만약 이 질문에 즉시 답할 수 없다면, 그대는 지금부터 하는 말에 유의해야 한다. 그대는 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대의 죗값을 치르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그로 인해 그대의 죄가 사해졌음을 믿는다면, 누가 뭐라고 하든 그대는 이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다. 구원은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믿음으로 얻는 것이고, 그 결과로 감정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감정으로 구원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그러나 그대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감정으로만 구원을 확인하려 하면 필시 구원으로부터 멀어져 버린다는 사실이다. 참다운 믿음이 지知, 정情, 의意를 동시에 고루 갖추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재철, 「새신자반」p.103
우연히 현지의 불교 지도자, 그리고 무슬림 공동체 리더와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모든 종교는 근본적으로 비슷하며 표면적인 차이가 있을 따름이라는 것이 두 사람의 견해였다. 이윽고 나의 의견을 묻기에 이렇게 되물었다.
"두 분은 산꼭대기에 계시는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 합니다. 우리는 모두 산기슭에 있고요. 제가 이쪽 길을 통해 정상에 오르고 있다면 여러분은 다른 루트를 타고 있어서 언젠가는 다 만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시죠?"
두 사람은 환하게 웃으면서 맞장구를 쳤다. "바로 그겁니다. 잘 아시네요."
나는 정색을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산꼭대기에 계시던 하나님이 지금 여기까지 내려오셨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인간들이 저마다 길을 찾아 그분께 다가오길 기다리지 않고 직접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오셨다면 어떻게 될까요?"
둘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모아 대답했다. "정말 멋질 것 같은데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그렇게 하신 예수님을 소개해 드릴까요?"
이것이 복음이다. 구원이라는 것을 점검표에 체크를 해 가며 한 단계씩 하나님께 가까워지는 과정쯤으로 생각한다면, 절대자에게 도달할 능력이 인간에게 있다고 가르치는 셈이다. 이는 사실상 인류를 죄에 몰아넣고 있는 무의미한 세상 종교의 바다에서 같이 허우적대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 스스로가 탈출구를 찾을 능력이 없고,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깊이 깨닫는다면, 그리스도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할 것이다.
데이비드 플랫,「래디컬」p.55
하나님께서는 그 홍수를 통해 노아 가족을 어느 정도까지 존귀케 해 주셨던가? 제일 높은 산보다 15규빗이나 더 높여 주셨다. 1규빗이 45.6센티미터이므로 15규빗이라면 6.84미터다. 노아 당시에도 권력가와 재벌은 물론 있었다. 그들이 악을 쓰면서 오를 수 있었던 곳은 세상의 정상이었다. 그러나 노아는 그보다 6.84미터 더 높은 곳에 있었다. 6.84미터라면 건물 2층 높이 정도다.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차이다. 그러나 그 차이는 삶과 죽음, 구원과 심판, 영원한 영광과 고통스런 멸망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절대적 차이였다.
이재철 목사,「내게 있는 것」p.89
지난 98년 9월 22일 저는 가족과 헤어져 홀로 스위스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해 겨울방학 때 아내와 아이들이 제네바로 와서 저와 한 달을 함께 지내다가 돌아갔습니다. 아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제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준비했겠습니까? 얼마나 쓸고 닦고 했겠습니까? 그런데 헤어질 날이 가까워오자 아이들이 짐을 하나 둘씩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네 아이들이 옷을 놓아두었던 서가의 선반이 비어갈 때마다 제 마음속에 그만 한 크기의 구멍이 뻥하고 뚫리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아이들이 제네바를 떠났습니다. 공항에서 집으로 홀로 돌아와 문을 열었습니다. 온 집이 텅 비어 있습니다. 방도, 서가도, 옷장도, 모든 것이 비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온통 비어 버린 제 마음속에 찬바람은 또 얼마나 일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베란다에 나가 아이들이 탄 비행기가 지나간 하늘을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고 몇 번이나 쳐다보았는지 모릅니다. 그 순간 일본의 소설가 미우라 아야꼬 여사가 풀이한 ‘어버이 親’(친)의 의미가 구구절절이 제 마음속에 사무쳤습니다.
‘부모란 떠나가는 자식의 등뒤를 바라보다가 보이지 않으면 동산 위에 올라가서 보고, 그래도 보이지 않으면 나무(木) 위에 올라서서(立) 바라본다(見).’
아이들을 떠나보낸 저의 심정은 한마디로 ‘親’이었습니다. 제가 이런 심정으로 자식을 키웠음에도 불구하고 제 자식이 장성했다고 해서 아버지인 저를 아버지로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제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하늘이여 들어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세상에 d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하고 가슴을 치면서 통탄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가 그런 자들이라 탄식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탄식 소리가 들리십니까? 당신의 자식으로 키웠건만 자식들은 당신이 아비인 줄을 알지 못합니다. 소도 주인을 알고 나귀도 주인의 구유를 아는데 하나님의 자식은 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통탄의 소리가 오늘 우리의 귓전을 울리고 있습니다.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너는 나의 자녀”라고 인 쳐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라고 생각지 아니하고 그분에게 등을 돌리며 살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그분을 아버지로 모셔 들이십니다. 오늘 이 시간부터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 가면서 살아가십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탄식소리가 우리의 귓전을 때리지 않게 하십시다. 자식인 나로 이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은 전혀 새롭게 펼쳐질 것을 믿습니다.
이재철 목사, 「회복의 신앙」p.80
복음은 경우에 따라서 직면하고 싶지 않은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십중팔구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죄인을 저주하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외면한 채, 사랑이 많은 아버지로 그려내는 진부한 글귀나 그림에 집착하기를 더 좋아한다.
데이비드 플랫,「래디컬」p.51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이들 가운데도 복음을 들을 기회가 전혀 없었던 이들이 죽은 후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사면을 받게 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주님에 관한 소식을 접하지 못했으니 당연히 하늘나라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예수의 이름을 듣지 못했다는 이유로 천국이 보장된다면 가서 그리스도를 전해 주는 것이야말로 상대방의 영원한 안녕을 해치는 더할 나위 없이 흉악한 짓이 되어 버린다. 지옥에 갈 가능성만 잔뜩 높인 셈이니 하는 말이다. 누군가 복음을 전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든지 하늘나라에 갈 수 있었는데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바람에 지옥에 가게 됐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고도 과연 고맙다는 인사를 받을 수 있을까?
그래도 미심쩍어하며 묻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예수가 누군지도 모르는 이들이 그분을 믿지 않았다고 죄인 취급하신다는 말씀인가요?" 좋은 질문이지만 내 대답은 "아니오"이다. 하나님은 들어 보지도 못한 구세주를 믿지 않는다고 유죄 판결을 내리는 분이 아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인간이 죄인 선고를 받는 것은 궁극적으로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는 까닭에 저주를 받는 것이다.
여기에 핵심이 있다. 예수님의 이름을 들어 보지 못한 수십억 인구는 그렇지 않은 이들과 전혀 다른 종류의 책임을 지게 된다.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거나 거부할 기회가 있었던 이들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구세주 예수에 대한 지식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인간은 누구나 원초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탓에 정죄를 받는 것이다.
데이비드 플랫,「래디컬」p.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