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2015. 8. 16.
신문에 아주 흉악한 범죄 기사가 났다고 합시다. 그런데 다음날, 전날의 보도 내용이 전부 사실은 아니라거나 그렇게까지 악한 범죄는 아니라는 식으로 내용이 바뀌었다고 합시다. 그 때 '정말 잘됐군.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들은 아니라니 다행이야'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까, 아니면 김이 샌다는 생각이 들거나 더 나아가 그 범죄자들을 정말 악한으로 취급하는 더없는 즐거움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나머지 전날 실린 기사를 더 믿으려 합니까?
만약 두번째 경우라면 종국에는 마귀가 되는 길에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이것은 검은 것이 좀더 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 나중에는 회색도 검게 보고 싶어할 뿐 아니라 급기야는 흰색까지 검게 보고 싶어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모든 것-하나님과 친구들과 우리 자신까지 포함해서-을 어떻게든지 악하게 보려고 고집하게 될 것이며, 그 짓을 영영 그만두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순전한 증오의 세계에 영원히 갇혀 버리는 것이지요.
C. 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2014. 10. 11.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을 이 땅 위 에덴이란 곳에 창설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모형을 가리켜 아예 '에덴'이라고 불렀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 위에서 왜 하필이면 에덴을 선택하셔서 그 모형의 이름마저 에덴이 되게 하셨는가? '에덴'이라는 히브리어의 뜻은 '기쁨'이다. 그러나 이것은 말초 신경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육체적 기쁨이 아니라, 오직 봉사를 다 할 때에만 주어지는 영적이고도 내적인 기쁨을 의미한다. 따라서 잃어버린 에덴을 회복한다는 것은 봉사를 회복하는 것을 뜻한다. 봉사과 회복되는 곳에 진정한 기쁨으로서의 에덴이 복원되는 것이다.
봉사란 귀찮고 궂은 일같이만 여겨진다. 웬만하면 피하고 싶은 것이 봉사다. 그런데 왜 그처럼 달갑잖은 봉사 속에 참된 기쁨이 자리잡고 있는가? 왜 봉사 속에서만 진정한 기쁨이 회복되는가? 내가 봉사를 행하는 그 낮고 낮은 곳에, 바로 그 곳에서 나를 섬기시는 주님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물이 낮은 데로 고여들듯 주님의 은혜 역시 낮은 곳에 머물고, 그 낮은 데가 곧 봉사의 현장이다. 그러므로 나보다 높은 데 있는 자를 섬기는 것은 봉사가 아니다. 그것은 보수의 대가이거나 아부일 뿐이다. 오직 나보다 낮은 곳에 있는 자를 섬기는 것이 진정한 봉사이다. 낮은 데에 있는 사람을 섬기는 것은, 그 사람으로부터 되돌아올 보상이 없기에 참된 봉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사람으로부터의 보상이 전혀 없기에, 그 곳에 계신 주님을 비로소 만나게 된다. 이것이 진정한 봉사가 있는 곳에 참된 영적 기쁨이 샘솟는 까닭이요, 그 곳에 에덴이 복원되는 이유이다.
이재철, 「회복의 목회」 p.79
사람들은 흔히 누군가를 사랑할 때 자신이 좋아하는 부분만 취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부정해 버리려고 합니다. 그것은 마치 뛰어난 축구 재능을 지닌 박지성 선수의 발만 좋아하고, 여드름투성이인 그의 얼굴은 보지 않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박지성 선수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머리에서 발까지 모든 것을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중략) 상대에게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취하려 하지 않고, 상대의 전 존재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의 입장에 서 있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의 입장에 서는 것 자체가 이미 사랑입니다.
이재철, 「성숙자반」p.374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가 정말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원한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에 대한 나의 사랑은 반드시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부터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는 나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에 빠뜨리기 위해 계명 가운데 어느 계명이 가장 크냐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어떤 답을 해도 올무에 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령 A계명이 가장 크다고 하면, "B계명은 크지 않다는 말이냐?"라고 즉각 공박당할 수 있었습니다. 진퇴양난이 될 상황에서 예수님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너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37-40)
여기서 '둘째는 그와 같다'는 것은 첫째와 둘째의 비중이 똑같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사랑'과 '사람사랑'이 가장 큰 계명이라 답하시면서, 그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사랑'과 '사람사랑'의 두 기둥 위에 하나님의 말씀이 세워졌다는 의미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앞에서,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고 했던 율법사들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사랑'과 '사람사랑'이 성경의 핵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재철, 「성숙자반」p.186
“그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요21:1).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있는 갈릴리로 가서 당신을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누구를 찾아가셨습니까? 당신을 배신한 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무엇을 하려고 가셨습니까? 비난하기 위해서였습니까? 질책하기 위해서였습니까? 복수하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사랑은 무엇입니까? 우리주님처럼 먼저 찾아가 주는 것입니다. 같은 장 14절을 보면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뒤에 마가 다락방으로 두 번, 갈릴리로 한 번 배신한 제자들을 찾아가 주셨던 것입니다. 나를 배신한 사람을, 내게 등을 돌린 사람을, 어떻게 웃는 얼굴로 찾아갈 수 있습니까?
이것이 가능한 것은 사랑이야말로 가장 큰 힘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보다 더 큰 힘이 없습니다.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힘 없는 자가 힘 있는 자를 찾아가는 것은 아부이거나 굴종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자신에게 등을 돌린 사람이라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배신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힘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찾아가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왜 사랑은 찾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까? 사랑은 시선의 부딪침에서 비롯하기 때문입니다. 전화로만 이야기하다가 서로 오해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내 속에 진실이 담겨 있고 사랑이 담겨 있을 때에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동안 프랑스 빠리에 여섯 차례 정도 다녀왔습니다. 그 중에서 루브르 박물관을 찾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본 것이 세 차례입니다. 맨 처음 보았던 때는 1972년이었는데, 한마디로 실망이었습니다. 워낙 이름난 그림이라서 크기 자체가 대단히 크리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 세로 77센티미터로 53센티미터에 불과했습니다. 저는 저 정도 크기의 그림을 가지고 무어 그리 야단스럽게 구는가 생각하고 왔습니다.
1994년에는 약간의 지식을 가지고 ‘모나리자’ 앞에 섰습니다. 이를테면 그 그림의 가로 세로 비율이 가장 이상적인 ‘황금비율’이라든지, 최초로 분명한 원근법이 사용된 그림이라서 입체감이 분명히 드러난다든지 하는 지식 말입니다. 그 때는 과거에 없던 방탄막도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처음 볼 때보다 감흥은 있었지만, 들이는 명성만큼 감동을 받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최근에 세 번째로 다시 가서 그 그림을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빠리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중견 미술가와 함께였습니다. 그분은 “이 그림은 모나리자의 눈을 어느 각도에서 쳐다보더라도 보는 이와 시선이 맞부딪치기 때문에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명작”이라고 했습니다. 설마 그럴 리가 있을까 생각하면서, 그림 옆에서 모나리자의 눈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 말대로 저와 시선이 딱 부딪치는 것입니다. 맞은편에 가서 보아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번에는 그 눈을 쳐다보면서 걸어 보았습니다.
그림의 시선은 계속 저를 따라 움직이면서, 어느 각도에서도 정확하게 일직선으로 제 눈과 부딪쳤습니다.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눈 같았습니다.
그렇게 모나리자의 시선이 저의 눈과 부딪치는 순간, 저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왜 그 그림을 세계 최고의 명화라 하는지, 왜 루브르 박물관의 많고 많은 그림 중에서 그 그림만을 방탄유리로 보호하고 있는지, 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67세에 죽기까지 그 그림만은 자기 옆에 걸어 두고 있었는지. 왜 그가 사람을 좀더 정확하게 그리기 위해서 열 번 이상 시체를 해부하면서 특히 얼굴을 세심하게 관찰했는지, 왜 프랑스와 1세가 그 그림을 자기 소유로 만들었다가 온 세계 인류가 다 보도록 루브르 박물관에 기증했는지, 그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 후 다른 그림과도 시선을 맞추려 해 보았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시선이 부딪치는 그림은 오직'모나리자'밖에 없었습니다.
한 집에서 사내아이 넷을 키우다 보니 싸움이 잦습니다. 싸우면서 미운 이야기를 할 때는 서로 눈을 쫙 내리깐 채 쳐다보지 않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아이들을 불러 서로 한번 쳐다보라고 눈을 똑바로 쳐다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쳐다본지 3초도 안 되어서 둘이 픽 웃어 버립니다.
사랑은 시선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찾아가야 합니다. 지금 당장 안 된다 할지라도 내가 자꾸 사랑의 시선을 던져 주어야 합니다. 그 때부터 사랑의 열매는 영글기 시작합니다.
이재철,「회복의 신앙」 p.196
21장 17절부터 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모두의 본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은 그 앞에서 본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피날레입니다.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다 보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남에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내 의사와 상관 없이 주위 사람들이 나에게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 때 내가 바른 진리의 본이 되어 주는 것, 그것이 크고 적극적인 사랑의 길입니다.
한번 조용히 생각해 보십시오. 진리를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 나를 본받으려는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올바르게 믿으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본받을 만한 대상이 되고 있습니까? 정말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나를 찾아와서 상담합니까? 그렇다면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프로 바둑기사가 바둑 한 판을 두는 데에는 보통 400여 수를 주고받습니다. 그런데 프로 기사들은 바둑이 끝나고 나서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확하게 복기(覆祺)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분들의 두뇌가 뛰어난 데다가 강 훈련을 한 결과이겠지요. 그러나 실은 프로가 아니더라도 이것이 가능합니다. 제가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 바둑실력이 3급이었습니다만 20-30수 이상을 복기 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바둑을 잘 두시는 분에게 어떻게 복기가 가능한지 물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프로 기사들은 의미 없는 돌을 놓지 않습니다. 의미 있는 돌 만 놓기 때문에 그 의미를 따라가면 복기가 가능하지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십시오. 30년을 살았습니까? 50년, 혹은 60년을 살았습니까? 그 가운데서 몇 수까지 복기 할 수 있습니까? 만약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도 모르게, 복기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인생이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면 지금까지 무의미하게 산 것이고 본이 못 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의미 있는 돌을 놓아야 합니다. 그 돌 하나 하나가 긍정적인 의미에서 본이 되어야 합니다.
이재철,「회복의 신앙」 p.221
인도네시아에 도착한 후 현지 정착과 적응으로 정신없는 한 달을 보낸 어느 주일날이었다. 현지 신학생들이 예배 특송을 하면서 영어, 한국어, 인도네시아어로 <주 품에 품으소서>를 찬양하고 있었다. 그 찬양의 첫 부분을 듣는데,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후두둑하는 소리가 내 마음에 들렸는데, 마치 하나님의 위로하는 당신의 날개로 나를 안으시는 것처럼 느꼈다.
"내가 지금 너를 그렇게 안고 있다."
내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엉엉 울어버렸다. 그렇게 하나님께 안겨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 때 나는 깨달았다.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떠나는 사람이 그래서 그 삶이 늘 새롭게 빚어져 가는 사람이 누리는 축복이라는 것을. 그분과 함께 발걸음을 맞추는 사람이 누리는 선물이 하나 있다면 바로 그분께 안겨서 맛보는 그분의 위로이다.
이용규, 「떠남」p.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