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역 후 쉬는 동안 하기로 맘 먹은 것 중 하나가 '책읽기'입니다.
그리고 군생활을 하는 동안 200여 권의 '읽어볼 책 목록'을 만들어 뒀습니다.
여기저기서 추천받았던 책들, 책 속에서 참고서적으로 나온 책들..
그리고, 그와 별개로 꼭 하고 싶던 일이 있었습니다.
어릴 적 읽다가 결말을 못 본 판타지 소설 읽기.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무슨 판타지냐고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지금 아니면 읽을 기회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차마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꺼낼 엄두는 안 나니 집에서 쉴 때 읽어야겠죠.
입대 전 3개월의 잉여시절과 이어진 OBC때는 드래곤라자, 눈마새, 피마새를 한 번씩 다시 봤습니다. 아마 저 세 소설들은 태어나서 3번씩은 넘게 본 것 같네요.
그리고 이번 백수생활중에는 꼭 이 책을 읽으려고 했습니다.
룬의 아이들-윈터러.
사실 읽다가 만 이런저런 판타지소설들이 많았지만, 생각하는 건 이거 하나였습니다.
제 학창시절에는 '판타지'라는 장르가 막 살아나고 있던 시기였고, 위에서 언급한 드래곤라자는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틈새로 말 그대로 '개나 소나' 판타지를 쓰기 시작해서 슬슬 끝물이 보이던 그런 시기였습니다. 지금은 라이트노벨이 다시 그 자리를 가져간 것 같네요.
아무튼.. 잡다한 판타지 말고 이 책이 생각난 이유는 단 하나.
1권부터 제가 읽은 그 어딘가까지의 내용 전체가 다 우울했다는 점입니다.
우울 그 자체인 책이었죠.
등장인물은 주인공과 몇 명만 생각나고, 내용도 거의 잊혀지고 한두 장면만 뇌리에 남았는데
이상하게 이 책이 엄청나게 우울했다는 것만 자꾸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결말을 못 봤다는 생각도 계속 들었구요..
그래서 그제 도서관에서 1,2,3권을 빌리고,
마지막권인 7권을 좀 전에 읽었습니다;;
다 읽은 후기.
1.
룬의 아이들-윈터러는 (룬의 아이들은 1부 윈터러/2부 데모닉까지 완간된 상태입니다.)
제 기억속 그대로 우울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이 우울감이 죽고싶다는 생각이나 이런 게 아니라, 뭔가 먹먹한 우울감이랄까요?
게다가, 내용 자체가 전부 우울한 게 아니라, 문체나 분위기에서 나오는 우울감입니다.
작가인 전민희 씨가 이 책을 처음 썼을 때는 저와 같은 나이였는데, 정말 '인생'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습니다.
2.
요즘 자주 사용되는 말이 '중2병'입니다. 무슨 뜻인지는 다 아실 테지요.
물론 SNS에서 오글거리는 말을 내뱉는 건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중2병이라는 단어 때문에 '낭만적'이라는 말과 점점 멀어지는 건 아닐까 아쉽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나 이런 걸 봐도, 사실 지금 기준에서는 오글거림 또는 중2병으로 포장해 버릴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낭만적인 어떤 시도에 대해 '철없음'으로 보는 시선이 이런 장르문학이나 또다른 문화들을 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 소설을 읽다 뜬금없이 든 생각은 아니고, IMF이후 팍팍해진 삶과 그 이후 기적처럼 펼쳐진 2002년의 이야기들, 그 때가 뭔가 문화가 피어나기 좋은 시기였다는 생각이 들고, 한편으로는 지금은 그와 같은 기적의 시절이 없어서 점차 피폐해지지 않나, 경제는 점차 회복되는 시기지 뭔가 마법 같은 이야기가 하나 펼쳐지면 다시 낭만의 어떤 시대가 오지 않을까 하는 복잡한 생각들을 해왔던 게 오늘 여기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쓰는사람도 무슨소리인지 모르는 소리.
그냥 나<-- 중2병 인정.;;
아무튼, 사람들이 오글거림도 받아줄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3.
마지막 권을 반절 정도 읽을 때쯤, 저는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이 책을 다 읽었었구나......;;
....어떻게 하나도 기억을 못 하는 걸까요. 결말이 엉망인 것도 아니고.
4권 정도 가서도 '어라? 여기까진 생각이 나는데'였지만
5권, 6권을 지나도 뭔가 읽었던 것 같더니만, 결국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본 셈입니다.
그래도 후회는 없네요.
어릴 적에 읽고서는 크게 와 닿은 게 없던 것 같지만, 책 읽고 2시간째 한숨 쉬는 중입니다.
엄청 감명 깊은 걸 본 뒤 나오는 현상이죠.
역시나 죽고싶다는 우울감이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야 하는구나'하는 우울감인듯..
판타지라고 가볍게 읽을랬더니, 뭐 이런 책이 다 있어 ㅡ.ㅜ
이 여운은 꽤나 오래 갈 것 같네요. 좋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