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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BIBLE

내려놓음


 기독교는 죽는 종교이다. 기독교는 힘을 모으고 힘을 과시하고 그것을 휘두르는 종교가 아니라 주님이 주신 은혜로 죽는 종교이다. 날마다 자아를 꺾고, 날마다 내 고집을 꺾고, 날마다 묵묵히 용납하고 살아내는 것, 이렇게 죽는 것이 바로 기독교이고 십자가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십자가의 길, 내 자아가 죽고 또 죽는 그 길을 걸어갈 때 거기서 놀라운 능력이 나타남을 경험하는 것이 기독교이다.

이찬수, 오늘을 견뎌라p.228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사람들은 대체로 이 말씀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만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앞 구절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1-12)


 이 말씀은 "나는 한 번도 물질의 노예가 된 적이 없습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물질의 주인이 되었고, 없으면 없는 대로 물질을 초월하는 자족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내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만약 내가 지금 탐심에 사로잡혀 있다면,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신들 과연 내가 그것을 담을 그릇이 되겠습니까?

이재철,「성숙자반」p.261


 여러분의 집 문 앞에서 구걸하고 있는 거지가 두 명 있다고 가정해 보자한 명은 가련하고절름발이고여기저기에 상처투성이다그리고 거의 굶어 죽을 지경이다반대로 다른 한 명은 건강하고 좀 더 강하게 보였다이 두 거지는 구걸할 때마다 똑같은 말을 사용했다둘이 똑같이 말하기를 "굶어 죽게 생겼으니 도와주십시오." 라고 했다그러나 한 사람은 정말로 가난하고불구자였기 때문에 다른 거지가 구걸하는 것보다 더 자비의 감정을 느끼도록 말했다그 감정은 자신의 말을 통해서그리고 자신의 탄식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었다그의 고통과 빈곤은 그로 하여금 다른 거지보다 더 비탄의 영으로 말하게 했다결국 그 거지는 다른 거지보다 더 빨리 사람들에 의해서 불쌍히 여김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다어떤 이들은 그들의 괴로운 마음을 가지고 기도한다또한 어떤 이들은 꾸밈없는 노골적인 생각과 벌거벗은 지식을 가지고 기도한다그러나 하나님은 확실히 다음과 같은 사람을 지켜보실 것이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사 66:2)


존 번연,「하늘 문을 여는 기도」p.67


 몇 년 전, 한 젊은 여성이 노크도 없이 내 연구실에 불쑥 들어왔다. 목사에 대한 예의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읽던 책에서 눈을 돌려 그녀를 보며 뭘 도와야 할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아니, 난 목사님을 도와드리러 왔습니다. 이따금씩 설교에서 사용할 수 있는 좋은 내용을 가지고 왔어요. 어젯밤 제가 성경공부를 하러 갔는데, 그 성경 교사가 목사님께서 좋아할 만한 내용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가 그러더군요. 뻣뻣한 아이를 포옹하는 것은 힘들다고요."

 "물론이지요." 그러면서 나는 사춘기에 있는 내 딸들을 포옹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해 보았다. 특히 그 아이들이 화가 나 있거나 잔뜩 풀이 죽어 있을 때는 더욱 어렵다. 마치 전봇대를 끌어안는 기분이라고 할까?

 "그러나 힘들지 않아요. 성경공부를 마친 그날 밤, 나는 두 살배기 남자아이를 봐주러 갔습니다. 그애는 하루 종일 진창에서 놀았는지, 좀 과장해서 말하면 지금까지 돌본 아이 중에서 가장 더러운 아이였습니다. 난 그애 방에 들어가자마자 두 팔을 활짝 펴서 그 아이를 끌어안았지요. 제가 그때 뭘 배운 줄 아십니까? 뻣뻣한 아이보다 더러운 아이를 끌어안는 게 훨씬 더 쉽더라고요."

 내가 기도에 대해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마다 그들은 내게 어김없이 이렇게 말하곤 한다. 자신들은 그리 착한 사람이 못된다고.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들처럼 죄 많은 사람의 기도를 별로 듣고 싶어하지 않으실 거라고 말이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를 잘 듣기 바란다. 하나님을 당신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은 당신의 죄가 아니다. 이 문제는 그리스도께서 대속하심으로 청산되었다. 그러나 '뻣뻣함'. 이것이 당신이 하는 기도의 생명력을 번번이 죽이고 있다. 당신은 이렇게 항변할 것이다.

 "당신은 내가 과거에 뭘 했는지 알기나 하십니까?"

 난 당신이 과거에 뭘 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것은 결코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스티브 브라운,「하나님을 누리는 기쁨」p.32


 초기 교부인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명예를 사랑하는 것은 참된 경건을 파괴하는 치명적인 원인이다. 다른 악덕은 악한 일을 낳지만, 이는 악한 방법으로 선한 일을 낳는다."

 위선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기만적이기 때문이다. 위선은 악한 목적을 통해 선한 일을 이용한다.

존 맥아더,「순전함


 유한한 인간인 우리는 영원하시고 영이신 하나님을 결코 온전히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지만, 유한한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성경을 통하여 무한하신 하나님을 완전무결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피조물인 인간에게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언제나 신비스런 초월자시다. 우리가 육체를 벗고 영으로 영이신 하나님을 뵈올 때까지는,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매일 알아 가야 한다. 만약 누군가가 하나님을 온전히 알았다고 단정한다면, 그 순간이야말로 그가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때다. 그는 지금 자신의 마음과 생각으로 빚어낸 하나님의 우상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특심할수록 우리 자신도 모르게 우리가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우상을 만들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의 우상을 붙들고 있는 자들이 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60억 인구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장 사랑하신단 말인가? 그처럼 자기중심적인 우상을 붙들고 있는 자에게 어떻게 진정한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자신이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또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라 확신하는 자들도 있다. …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고 제일 중시하신다고 확신, 자신의 후원 요청에 응하지 않는 자의 믿음을 쉽게 폄하하거나 비판하기도 한다. 그 역시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우상을 새긴 결과다. 그런 우상을 지니고는 자신과 다른 사역에 헌신하는 자를 존중하거나 사랑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만을 위해 역사하신다는 하나님의 우상을 품고 사는 자들도 있다. 교회나 선교회에 다툼이나 분열이 일어나는 이유는 대부분 이런 사람들 때문이다. 부부 중 한 사람이 이런 우상을 새길 경우에도 똑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사랑하셨지만, 하나님께서 성전 건축을 위한 당신의 도구로 쓰신 자는 그의 아들 솔로몬이었다. 주님께서 3년 동안 숙식을 함께하며 열두 제자를 훈련시키셨지만, 막상 이방선교의 견인차로 쓰신 자는 엉뚱하게도 주님을 대적하던 바울이었다.

 자신이 주님을 위해 일하는 이상 자신의 일은 반드시 흥해야 한다는 우상을 섬기는 자들도 있다. 과연 그런가? 결코 아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일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실패하고 망할 수 있다. 나의 실패와 쇠망을 통해 주님의 더 큰 역사가 일어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언제나 흥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다. 그 목적을 위해 나의 일은 얼마든지 쇠할 수 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기에 자신이 현재 뿌리고 있는 씨앗의 열매를 반드시 보아야 한다는 우상에 빠진 자들도 있다. 봄에 농부가 뿌린 씨앗은 여름이 지나 가을이 되면 열매가 되어 농부에게 되돌아온다. 그러나 진리의 씨는 밭에 뿌린 곡식의 씨와 같지 않다. 때로는 그 해에 열매가 거두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결실하기까지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이 걸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진리는 영원하기에,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나라의 영원 속에서 그 열매를 확인하는 경우가 도리어 더 많다.

이재철,「매듭짓기」p.107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상당수는 아직도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다 보면 큰 재산을 상으로 받게 되겠지?'라는 억측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무병장수와 부'를 역설하는 메시지를 들어 보면 이러한 사고방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이것은 믿지 않는 이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물질을 사용하고 있는 자칭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은밀히 뿌리내리고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어느 날 저녁외국의 지하 가정 교회 모임에 참석해서 성경을 가르치는 여러 가지 이슈들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영어를 조금 할 줄 아는 현지인 아주머니가 입을 열었다. "가끔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보면 미국 방송이 잡혀요한번은 예배를 실황으로 중계해 주는 방송을 보게 되었는데 목회자들이 멋진 옷을 입고 근사한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더군요그런데 메시지를 전하면서 그러는 거예요누구나 믿기만 하면 이런 것들을 누릴 수 있다고요." 잠시 멈췄다가 여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날우리 교회 모임에 참석해서 주위를 둘러보았어요너나없이 가난할 뿐더러 목숨을 걸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뿐이었죠." 그리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그러면 이렇게 사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부족하기 때문인가요?"

그 순간 나는 미국 교회와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과 세상적인 성공을 하나로 생각하는 신학을 더러는 공공연하게경우에 따라서는 수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것은 신약성경에서 보는 기독교의 모습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오늘날 교회는 헌금으로 마련된 자원을 어떤 우선순위에 따라 사용하고 있는가미국교회의 경우 매년 예배당 건물에 100억 달러, 10조원 이상을 쏟아 붇고 있다고 한다미국 교회들이 소유한 부동산의 가치는 2300억 달러무려 230조원에 이른다넘치는 돈과 자원을 이른바 성전을 짓는데 허비하고 있는 것이다그렇게 호화로운 건물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제국아니면 왕국이러한 현실의 핵심을 들여다보면 장소를 기준으로 삼는 예배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이렇듯 문밖에 있는 가난한 이들에게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무시하고 시간과 돈을 엉뚱한데 써 버리는 잘못된 신앙이 아닐까 싶다주일마다 그처럼 커다란 건물 중 한곳에서 설교하고 있는 나의 현실을 생각하면 이 글을 쓰면서도 마음이 아파 온다어떻게 하면 엉뚱한 곳에 교회의 자원을 낭비하는 시대의 트렌드를 바꿀 수 있을 까 끊임없이 이 질문을 붙들고 씨름해 보지만 이것은 단순히 목회자와 교회건축위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마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처럼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 나 주님을 좇을 때 재물을 어떻게 처리할지 깊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데이비드 플랫,래디컬p.162


 중국이 공산화될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외국인 선교사들 대부분이 추방되어 상해에서 배를 타고 떠나야 했다. 많은 선교사들은 떠나가는 배에서 이들이 세운 아직은 영적으로 어린 중국 교회를 걱정하며 조만간 무너지고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슬피 울었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중국 교회는 핍박 속에서 더 강해졌다.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은 중국 공산당 정부야말로 중국 교회에 있어서 큰 저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산당 정부를 사용하여 중국 교회를 더 강인하게 만드셨다. 1950년도에 그 숫자가 약 50만 명에서 100만 명이 채 안 되는 기독교인들은 지금 적게는 4천만 명 많게는 1억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될 정도로 성장했다. 중국 기독교는 체질 개선을 통해서 서구에서 유래한 종교 이미지를 벗고 현지화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공산당 정부를 사용하셔서 내지(內地)까지 연결되는 새로운 고속도로뿐 아니라 우상 타파를 통해 통일된 사상의 고속도로, 그리고 중국 만다린 언어의 고속도로를 만들게 하셔서 현재 기독교의 급성장을 이루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선 우리의 아픔과 고통조차도 우리를 위하여 아름답게 사용할 수 있으시다. 우리가 신뢰함으로 그분께 온전히 의지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이용규,「떠남」


 근대 중국은 서구 열강에게 패한 뒤 문호를 개방해야만 했다. 그와 동시에 서구로부터 수많은 선교사들이 중국으로 몰려들었다. 이때 선교사들은 대부분 요한계시록 3장 7절과 8절이 새겨진 깃발을 들고 중국으로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하나님이 중국 문을 열어 주셨으므로 결코 닫을 사람이 없다는 믿음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1949년에 모택동의 공산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교회를 문을 닫았고 선교사들은 다 쫓겨났다. 그때 선교사들의 절망이나 고통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향해 외쳤다. 

 "하나님, 왜 중국을 버리십니까?"

 중국이 공산화되기 이전에 선교사들이 가장 애를 먹었던 것은 중국 전역에 만연되어 있던,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미신이었다. 그런데 지난 세월 동안 공산당 치하에서 그 모든 미신이 타파되었다. 공산당 독재 정권이 아니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선교사들이 10억 인구의 중국에서 직접 이 일을 하려 했다면 수백 년이 걸렸을 것이다. 이것은 1987년 방한했던, 중국 조선족 목회자 중 가장 원로인 김성하 목사님의 말이다. 하나님은 이제 미신이 없는 중국에 다시 복음의 문을 열어 주셨다. 이미 중국 크리스천의 수는 우리나라 인구보다 더 많다. 앞으로도 중국 교회는 계속 불길처럼 번져 나갈 것이다. 21세기에는 중국이 세계 교회의 핵심이 될 것이라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역사적 사건의 배후에서 하나님은 신비스럽게 당신의 역사를 이루고 계신다. 우리 개인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구속 사관을 가진 사람만이 그 손길을 볼 수 있기에, 그는 매일매일 자만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바르게 살아갈 수가 있다.


이재철「청년아 울더라도 뿌려야 한다」p. 124


제 경우를 예로 들까 합니다교회 사무실에 있다가 외출을 해야 하는데 제 차 앞에 다른 차가 브레이크를 채우고 문을 잠근 채 가로막고 있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그럴 때 저는 차 주인을 찾아다니지 않습니다 저는 두 가지로 해석합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나와 함께 하시는데도 지금 이 차로 길을 가로막으신 것은 첫째내가 지금 가면 해롭기 때문인가요둘째내가 있는 이 현장에서 유익함을 주시기 위함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마음이 편해집니다그리고 제 방으로 돌아와서는 평소에 읽으려고 했지만 시간이 없어서 읽지 못한 아무 책이나 뽑아서 읽습니다저는 주일마다 성경을 순서대로 설교하기 때문에 늘 상 다음 주일 설교할 부분을 좀더 쉽게 설명할 길이 없을까를 생각한는데 희한하게도 제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그 책 속에 나옵니다그 책은 성경과 전혀 상관없는 책인데도 꼭 필요한 내용이 나오는 것입니다.

한 번은 제가 제주도에 갔다가 새벽에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예약이 되어 있었습니다제주도 남원에서 출발해서 서귀포 공항으로 가는데 그 곳 목사님께서 저를 공항까지 데려다 주셨습니다라디오를 켜니 김포공항뿐아니라 한반도 남쪽이 온통 안개로 가득차서 비행기 이착륙이 멈추었고 한두 시간 후에야 안개가 걷힐 것이라는 보도가 흘러나왔습니다저는 저를 데려다 주신 목사님께 그만 들어가시라고 하고 비행기를 기다렸습니다그런데 745분에 출발하기로 되어 있던 비행기가 845분이 되어도 안 뜨는 것입니다출발 예정 시간을 물었지만 모른다는 대답뿐이었습니다.

마침그 날은 모든 신문이 김정일의 동거녀라는 성 아무개 여인의 탈출 기사로 처음부터 끝까지 채워져 있었습니다저는 앉아서 그 기사를 다 읽었습니다재미있었습니다그렇게 한두 시간이 지났습니다그런데도 비행기는 뜨지 않았습니다여기저기서 사람들의 불평이 터져 나오고 항공사 관계자들에게 욕을 하고 야단이 났습니다.

그 때 저는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못 가게 막으셨다면 여기에서 나에게 보여 주실 다른 것이 분명히 있나 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그래서 공항 안에 있는 조그만 책방으로 들어갔습니다거기에는 선정적인 잡지나 가벼운 베스트셀러밖에 없었는데그 중에서 리더스 다이제스트’ 6월호가 눈에 띄었습니다그걸 사서 첫 페이지부터 순서대로 주욱 읽어 가다 보니 미국인의 정직성에 대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대도시중 도시소도시 등 미국 열두 개의 도시를 선택한 다음지갑 120개에 50달러씩을 넣어서 각각 열 개씩 뿌렸습니다그래서 지갑 중 회수되어 오는 지갑의 수를 토대로 미국인의 정직성을 테스트해 보았습니다그 기사에는 놀랍게도 60%이상 회수되어 미국인은 그래도 아직까지 정직하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마침 제가 그 주일 설교본문인 요한 복음 15장의 주제를 정직으로 잡고정직에 대해 우리 교우들에게 전할 좀더 생생한 예가 없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 이곳에 이렇게 앉아 있게 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첫 비행기가 떴더라면 어떻게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샀겠습니까그 기사를 일고 하나님께서 제게 보여 주신 것에 감사드리는 순가비행기가 떠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습니다비행기 좌석에 앉았을 때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인생에 안개가 끼었습니까인생의 비행기가 지연되고 있습니까원망하지 마십시오지연되었기 때문에정체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하는 은혜가 있음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그것이 바로 참된 신앙인의 삶의 자세입니다.

 

이재철,회복의 신앙」 p.150


야곱은 밤에 일어나 가족들을 깨우고 짐을 챙겨서 얍복 강을 건너게 한다이것은 무슨 뜻인가형 에서에게 예물을 보내놓고 야곱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아무리 자신이 방책을 세워도 그것으로는 부족해 보였다두려워 떨던 그는 일단의 무리들을 버려두고 가족들을 깨워 강을 건너게 했다불안이 엄습하는 가운데 재산은 포기하더라도 가족들만큼은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얍복 강은 요단 강의 한 지류로써 동서로 흐르고 있었다당시 야곱과 그의 가족들은 북쪽에서부터 요단 강줄기를 따라 내려왔고이미 얍복 강 남쪽 지역에 있었다그가 지나온 마하나임은 얍복 강 남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가나안은 남서쪽에 있었다그리고 남동쪽인 에돔 지역에서 에서가 북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얍복 강 남쪽에서 북족으로 강을 건넌다는 것은 후퇴를 의미했다틀어진 방향이었다야곱은 불안이 극도로 치닫자 하나님을 더 이상 신뢰할 수가 없었다하나님께 자신의 가족들을 맡길 수 없었다.

그런 그가 가족을 강 저편으로 보내놓고 홀로 남았다위기의 순간에는 결국 혼자 남을 뿐이다가장 외로운 모습으로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스스로의 노력으로 현실을 극복하려고 애쓰고 또 애쓰지만 해결할 수 없어 결국 홀로 남았다혹 야곱이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홀로 남았을까그랬다면 그는 자신의 하인들과 같이 남았어야 했다야곱은 혼자라도 살기 위해 그렇게 했을 수 있다.

점점 더 위기가 가까이 온다고 느끼자 그의 우선 순위가 더욱 분명해졌다가족까지 저버리는 가장 이기적인 모습으로 야곱은 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최후에 남은 것은 바로 였다이 는 하나님과 대척적인 방향에 서 있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밤새도록 야곱과 씨름을 한다그 어떤 사람은 후에 '하나님'이었음이 밝혀졌다우리는 위기의 순간에 결국 하나님 앞에 홀로 서게 된다광야 속의 광야이다내 속에 숨은 자아를 대면하고 또 하나님을 대면하는 자리이다.

그런데 왜 서로 씨름을 했을까어떤 이는 이 장면을 보면서 야곱이 기도한 것이라고 해석한다어떤 이는 야곱이 하나님과 기도의 씨름을 한 것이고결국 목숨을 건 기도로 하나님의 축복을 얻어낸 것이라고 생각한다즉 열심히 기도해서 결국 하나님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굴복시키고 자신이 얻고자 한 축복을 완성하는 것이 옳다는 이해방식이다.

과연 그럴까열심히 떼를 써야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고 또 위험에서 구해주시는 것일까씨름을 기도라는 상징으로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씨름은 실제 상황이었다그것은 씨름을 한 후 야곱이 다리를 절게 되었던 것으로 알 수 있다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굳이 야곱과 씨름을 하고 있었을까이것은 야곱의 이기적인 지향과 하나님의 사명이 부딪히는 상황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남쪽으로 가라네 예전의 관계를 대면해라아버지의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 위협을 느껴도 에서를 대면해라.”

야곱은 가능한 한 문제를 피해가고 싶었다모험하고 싶지 않았다그러한 그를 하나님은 붙잡았다.문제를 피해가려던 야곱은 실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려 한 것이다.

현실의 두려움 앞에 문제를 회피하고자 하는 야곱 자아의 몸부림이 한 지향이었고야곱이 도피하려는 틀어진 관계라는 현실을 직면하도록 이끄는 하나님의 시도가 또 다른 지향이었다이 싸움은 믿음 없는 자아와 하나님의 씨름이었다도망가려는 야곱과 그것을 친히 말리시는 하나님 사이에서 일어난 씨름이었다그런데 하나님이 이길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왜일까우리 자아가 항복될 때까지는 하나님이 일하실 수 없다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과연 몇이나 될까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다강제로 우리 안에 들어오려 하지 않으신다우리가 고집을 부리는 동안 하나님은 기다리실 수 밖에 없다둘째 아들이 유산을 달라고 했을 때 떠나 보낼 수 밖에 없었던 아버지처럼.

우리가 고집을 부리는 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자발적이지 않은 순종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결국 하나님은 야곱의 엉덩이뼈를 어긋나게 하는 방법을 쓰셨다씨름에서 뼈를 위골(違骨)시키는 것은 반칙처럼 보인다하나님께서 이기려다 안 되니까 야곱을 상대로 반칙을 쓰신 것일까아니다.

유목민에게 있어서 이동성은 생명과 같다과거 몽골인들은 움직일 수 없게 된 노인들을 안락사 시키는 전통이 있었다이동할 능력이 없으면 죽은 존재와 다를 바 없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적이 쳐들어 와도 일단 도망가면 살 수 있다야곱은 에서에게 힘으로 이길 수 없으니까 도망갈 생각부터 한다하나님은 그가 도망할 생각을 하자 의지하고 있던 수단을 건드리셨다야곱이 끝까지 믿었던 것은 두 다리였다그 중에 하나를 치신 것이다극약 처방이었다야곱의 꾀는 완전히 꺾였고 최악의 상황에 봉착한 것이다.

그리고는 하나님은 이제 떠나가시겠다고 했다. ‘네가 그렇게 믿을만한 존재라면그래이제 네 힘으로 어떻게 하겠니?’라는 메시지이다.

이제는 야곱이 하나님을 붙잡는다.

내게 복을 주십시오그렇지 않으면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덧붙여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내 노력으로는 이제 이 상황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당신이 이겼습니다당신의 축복만이 나의 유일한 탈출구임을 인정합니다내 인간적인 모든 노력을 포기합니다당신의 방법이 나를 지배할 것입니다.”

야곱은 싸움의 과정에서 자신이 대결하고 있는 상대가 하나님인 줄 이미 알고 있었다싸움의 방향을 통해서 알았을지 모른다그가 가려는 방향이 하나님이 가라 하신 방향과 반대였다하나님의 방향으로 당기는 그 사람을 보면서 하나님이실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하나님께서는 복에 대해서 언급하기 전에 야곱에게 물으신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너라는 사람이 그 동안 추구해 온 것이 무엇이었니네게 최고의 우선 순위가 무엇이었니?’라고 물으시는 것이다야곱은 대답한다.

야곱즉 속이는 자였습니다경쟁하는 자였습니다나만을 위해서 살아온 삶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제는 네가 바뀔 것이다.”

야곱이 바뀌는 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하나님께 자아가 항복했을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신다.

네게 새 이름을 주겠다. '이스라엘'이라고 해라네가 하나님과 사람과 더불어 싸워 이겼다.”

이 말씀은 야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야곱의 자아와 하나님 사이의 두 지향 사이에 야곱이 있었다.

 

야곱은 이 싸움에서 결국 승리한 것이다그가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 항복했기 때문이다야곱이 하나님을 이긴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 축복을 구함으로 이 긴 싸움을 승리로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은 명칭이 가진 뜻대로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자아와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충돌을 겪는다이 충돌의 역사는 바로 언약 백성으로 만들어져 가는 과정이다또한 우리의 영적 성장 과정을 압축한 하나의 모본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야곱의 상황을 바꿔주시지 않았다대신 야곱을 바꿔 주셨다자아를 내려놓을 수있도록 이끌어 주셨다아침 해가 돋았을 때 야곱은 에서를 만날 용기가 났다야곱이 변했다는 사실을 에서를 대면해서 한 그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형님을 뵈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 같습니다

야곱의 마음이 바뀌고 두려움이 떠나니 평생의 경쟁자이자 숙적이었던 에서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상황이 아닌 야곱 자신이 바뀐 것이다실은 야곱이 두려워했던 이유는 자신 안에 있던 에서에 대한 이미지 때문이었다.

전에는 형의 것을 빼앗으려던 야곱이 이제는 자신이 가진 것을 형과 진심으로 나누려고 했다전에는 자신을 보전시켜주는 대가로 예물을 주려고 했다대가를 바라는 선심이었다그러나 이제는 그것도 바뀌었다그러나 이제는 그것도 바뀌었다그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형과 나누려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야곱의 태도가 바뀌고 에서와의 관계가 해결되자 야곱은 삶면서 더 이상 에서로 인한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에서는 하나님의 역사에서 그렇게 사라졌다그의 야곱 조련사로써의 역할이 끝났기 때문이다.

축복과 광야의 연단은 같이 가는 패키지였다내가 축복의 통로가 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내 삶 가운데 연단의 사람을 붙여주심을 기억해야 한다하나님의 관심은 내가 바뀌는데 있다힘든 사람을 붙여주시는 이유이다.

 

이용규,떠남」 p.119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님은, 교인들로부터 정말 존경받는 목사가 되기 원한다면 조금만 가난하게 살라고 권합니다. 100원을 얻을 능력이 있어도 80원으로 만족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간의 욕심엔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100원의 능력을 가진 자가 100원을 모두 얻어 즐기는 순간, 그는 곧 200원의노예로 전락하고 맙니다. 목사가 그렇게 살아서야 일반 교인과 무슨 차이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경우 교인보다 오히려 목사가 훨씬 더 추해 보일 것은 불을 보듯 뻔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께 간곡히 당부 드립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혹 어디 가서 설교하였을 때 사례비를 지급해 주면, 하나님의 손길로 여기고 겸손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으십시오. 그러나 일단 전임목회자로 목회지가 결정되어 매달 봉급을 받게 되면, 타 교회에서 설교나 집회를 요청할 경우 사레비를 사양하십시오. 거저 받은 은혜를 그 교회 교우님들과 거저 나누십시오. 여러분의 전임목회지에서 받는 봉급을 족하게 여기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를 촉구한 세례 요한의 설교 내용이 "받는 요(料)를 족한 줄로 알라"(눅 3:14)는 것이었음을 일평생 잊지 마십시오. 그래야 청정한 영혼을 견지할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전임목회지에서 받은 요를 족한 줄로 여기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결코 참된 섬김과 봉사의 목회자가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요를 족한 줄로 여기지 않는 목회자의 섬김과 봉사란, 교인의 주머니를 노리는 미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재철,「비전의 사람」p.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