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처음으로 산 시집이다.
무명의 시인이지만, 아래 글에 나와있는 몇 편의 시만으로도 가슴을 울려 왔다.
연가 - 아내의 묘비명
목숨이 백 년은
푸르를 줄 알았다
사랑은 천 년도
짧을 것만 같았다
차운 비 한 서슬에
놀라 깨니 적막한 꿈
꽃향기 새소리도
무명(無明)으로 쓸려간다
깊은 강 건너
잊혀진 내 무덤가
그리운 그대 음성
바람결에 뒤채인다
이제 곧 부모님의 서른네번째 결혼기념일이 다가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다섯번째 기일도 다가옵니다.
대학교 3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밤늦게 귀가했는데 뭔가 기분이 찝찝하더군요.
당시 어머니께서는 아들 둘을 무사히 대학에 안착시키시고
학원을 차려보고 싶다던 오랜 꿈을 드디어 현실화시키고 계신 중이라 늘 들떠 계셨었는데,
그날따라 그렇게도 장난치기 좋아하시던 분이 말 한 마디 없으시더군요.
어머니의 눈가가 젖어 있는 것이 불안했습니다.
“나 학원 계약 취소하고 왔어.”
“응? 뭐 문제 있어요? 계약금까지 냈잖아요.”
“나 유방암 말기래.”
커다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뭔가... 슬프다기보다는,
울컥 화가 나고 누군가를 미치도록 원망하고 싶은데, 대상이 없는 기분이랄까요.
건강검진 결과가 나온 그 단 하루만에
세상에서 가장 건강하고 활발했던 45세의 젊은 어머니는
우스운 아침드라마에나 등장하는 바로 그 시한부인생이 되셨습니다.
두 번의 대수술.
재발.
전이.
그리고 죽음과도 같은 고통이라는 열여덟 번의 항암치료를 받으시는 동안
어머니는 단 한 순간도 웃음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도인(道人)
우리 가족 넷 중에서 하나가 죽어야 한다면
그건 당연히 나야
당신이 죽으면 집안이 기울고
애들이 잘못되면 미래가 사라지니까
내가 선택된 건 불행 중 다행이야
선택이고 다행이라니?
어떻게 강 건너 불 얘기하듯
그런 끔찍한 말을 담담하게 할 수 있을까
투병 5년 내내 아내는
도인이 따로 없었다
내가 풀죽어 말소리라도 가라앉으면
왜 또 어린애처럼 그래?
따끔하게 침을 놓던 사람
의연하게 살라고 그토록 나를 채질했지만
아내가 가자마자 나는
금세 숙맥이 돼 버렸다
밥은 하루에 몇 끼를 먹어야 하는지
잠은 몇 시에 자고 몇 시에 일어나야 하는지
사람들은 왜 왔다 갔다 하며 웃고 떠드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백치가 돼 버렸다
입으로는 차마 꺼내지 못했지만
어머니의 임종까지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임종을 곁에서 지키겠다고 결심한 저는
고시공부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입대도 미루고 미뤘습니다.
만약 여러분 가족 중에 시한부 선고를 받은 분이 생긴다면
특별한 분들을 제외하고, 저처럼 평범한 사람이라면 두 가지 선택지 중에 하나를 고르게 됩니다.
하나는, 자기가 하던 일에 더욱 전념하여 뭔가 성과를 이뤄서 돌아가시기 전에, 혹은 영전에 바치는 것.
다른 하나는, 최대한 시간을 할애해서 마지막까지 함께 최대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추억을 만드는 것.
솔직히 무엇이 정답인지는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때의 저에게는 답이 분명해 보였을 뿐입니다.
약속
내가 갈 때가 되면 알려줘
꼭 알려줘야 돼
그래 그렇게 할게
마침내 시간이 다했다
주치의가 말렸다
말씀하지 마세요
그냥 평화롭게 가실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아들도 거들었다
나는 아내와의 약속을 어겼다
평생 크고 작은 약속을 수없이 어기고
결국 마지막 약속조차 지키지 못했다
아내는 떠나기 전
꼭 남기고 싶었던 말이
있었던 게 아닐까
그가 떠난 후
내가 수천 수백 번 되뇌인
미안해
사랑해
그런 부질없는 말이 아닌
정말 어떤 특별한 말...
당신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시간이었겠지만,
저에게는 정말 감사하게도, 어머니께서는 이후 4년을 더 사셨고
덕분에 저도 더 이상 국가의 부름을 외면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스물아홉 살의 큰아들이 이등병 계급장을 단 지 일주일째가 되던 날에
어머니는 눈을 감으셨습니다.
고별
아내가 많이 아프다
눈 꼭 감고 참고 있다가
문득 혼잣말처럼 묻는다
‘날 사랑해?’
나는 화들짝 놀라 대답한다
‘그럼! 사랑하고 말고!’
아내가 생전 하지 않던 청을 한다
‘나 한 번 안아 줄래?’
나는 고꾸라지듯 아내를 안는다
목구멍 속으로 비명이 터진다
‘여보! 제발 가지 마!’
이윽고 아내가 가만히 나를 민다
‘이젠 됐어...’
여간해선 울지 않는 아내 눈이 흠뻑 젖어 있다
장례식 날 관 뚜겅을 덮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내를 안았다
얼어붙은 눈물
얼음같은 체온
사람들이 나를 떼어 놓는다
나는 아내를 보낸다
내 남은 삶과 꿈도 함께 고별한다
스물두 살 차이, 어머니라기보다는 큰 누나 같았던
시니컬한 유머를 즐기시던 나의 사랑스런 어머니는, 그렇게 사십대의 아름다운 얼굴로 눈을 감으셨습니다.
원래도 예민하고 감수성 넘치는 성격에
그 후 몇 년 간을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시던 아버지께서는
작년 이맘때 쯤 젊은 시절 놓았던 펜을 다시 드셨고,
지난 달, 그 4년의 이야기를 담은 작은 시집을 내셨습니다.
아내의 무덤
겨울 눈밭에 내가 서 있다
손발보다 가슴이 더 시리다
새봄이 또 와도
기다리는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여름 소낙비가 하늘 무너진 듯 울고 간다
내 눈물은 아직 다하지 않았다
가을 마른 잔디 위로 빈 바람이 흩어진다
내 영혼도 부서진다
허깨비 같은 내가
하릴없이 무덤가를 서성인다
오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가 한 줌 흙으로 다시 만날 날이
이 시집이 나오면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다시던 아버지께서는
사실, 전혀 그러지 못하고 계십니다. ^^;
책의 편집과 출판 문제로 조금은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신 것이
그나마 다행이랄까요.
결혼도 안한 제가 어찌 상처의 슬픔을 알겠습니까.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책장을 넘기며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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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가볍게 쓰자고 다짐했는데, 역시나 실패했네요. 흐
아무래도 이만 마무리를 지어야겠습니다.
쓰기 버튼이 무겁느니 어쩌니 해놓고, 일필휘지해 버렸습니다.
제가 써 놓고도 반복해서 들여다 볼 용기가 나지 않는 내용인지라,
너그러히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시인의 아들'답지 못한 부끄러운 필력에도 불구하고,
제 첫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보냅니다.
시집에 관한 뒷이야기가 있으면, 다시 한 번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p.s.
<아내의 묘비명> 이라는 시는 실제로 저의 어머니의 묘비명입니다.
대전공원묘원에 가시면, 예쁜 무덤 옆에 자그마한 시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4년째 매주 바뀌는 꽃과 함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