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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



순전한 기독교(하드커버)

저자
C. S. 루이스, 루이스 지음
출판사
홍성사 | 2001-06-15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2001년 한국기독교출판문화상 일반신앙 번역부문 최우수상 수상!...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기독교에 대해 알고 싶다며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항상 나오는 책입니다.

저도 스물한 살 때 이 책에 도전했지만, 당연한 이야기를 어렵게 하는 것 같아서 별 감흥이 없었습니다.

사실 끝까지 읽었는지도 가물가물하고...독서목록을 보니 2008년에 읽기는 읽었네요.


그러던 중, 책을 찬찬히 읽을 계기가 생겼습니다.

'루이스가 나니아의 아이들에게'를 번역하신 정인영 선생님이 책읽기 모임을 제안하셨거든요.

많이 읽은 사람들이 아닌, 책장에 꽂아 두기만 한 사람들을 모집한다는 글에 힘을 얻어 참가를 신청했습니다.

매주 월요일마다 모여서 총 5회에 걸쳐 책을 읽었습니다. 

돌아가며 한 단락씩 소리내 읽고, 중간중간 멈춰서 이야기도 하구요.


사실 이런 방식으로 읽어야 가장 좋은 책이긴 하지만, 나름의 요약을 올려보려 합니다.

요약만으로는 '이 사람이 왜이래'소리가 나올 정도의 책입니다. 그냥 직접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아래 요약은, 제가 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요약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아래에서는 편의상 루이스라고 칭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사람들이 어떤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치기를 당하면 화가 나고, 뭔가를 주면 대가를 받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데서부터 의문이 시작됩니다. 옳다고 믿으나 하지 않는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손해를 봄에도, 무언가를 위해 희생하는 경우도 있죠. 재미있는 건, 이렇게 상반되는 본능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더 약한 충동을 도우려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는 것이 그렇습니다. 이성적인 생각이라면 그러지 않아야 하는 상황에도 말이죠. 그렇다면 어떤 것이 정상일까요? 어떤 것이 선일까요? 결국 루이스는 완전한 도덕법은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범신론과 유일신론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해 볼까 합니다. 범신론은, 신이 선악의 구분 너머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헤겔과 힌두교가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죠. 이들에게 있어서, 질병과 가난은 악이 아니라 그저 신의 일부입니다. 반대로, 유일신론은 신이 선하고 의로운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자신의 입장이 분명합니다. 우주는 신의 작품이며, 질병과 가난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는 질병과 가난이 왜 있을까요? 신이 있다면, 왜 잘못되었을까요?

루이스가 21세기에 태어났으면 훌륭한 키보드워리어가 되었을 겁니다. 루이스는 질문 자체를 먼저 공격합니다. '우주의 일부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우주 자체에 의미가 없다면 잘되고 잘못되고의 생각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당신 질문 자체가 신을 인정하는거임'이라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싶기도 하고... 그렇습니다ㅎ 비슷한 예를 들자면, "세상에 절대적인 건 없어!"라는 문장은 그 자체가 절대적이어야만 가능한 논리입니다. 즉 모순이죠. 같은 논리로 위의 질문도 타파가 가능하다고 합니다(점점 산으로...)


 자, 다시 돌아와서... 세상이 왜 이런가에 대한 질문은 '기독교적 관점'과 '이원론'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적 관점으로는, 악하게 된 세상을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그 원래 모습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이원론에서는, 선과 악이 동등하며 끝없이 싸우게 된다고 말합니다. 즉, '자기가 옳다'고 하는 두 가지 독립된 힘이 있다는 것이죠.

 루이스는 이원론에서 하는 이야기를 파고 들어가 봅니다. 악하게 사는 건 사실 쉽지 않습니다. 머리도 좋아야 하고, 성실하고 근면해야 합니다. 게으른 악당을 본 적은 없으시죠? 그렇다면 악을 악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입니다. 과연 누가 한 쪽을 선으로, 한 쪽을 악으로 판단했을까요? 결국 선과 악을 판단하는 그 위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또 하나를 살펴본다면, 악이 왜 생기느냐의 문제입니다. 악은 돈이나 권력이나 쾌락을 '정도 이상으로' 추구할 때 발생합니다. 하지만 돈과 권력, 쾌락 자체는 악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들이죠. 결국, 악이라는 것은 선을 그릇된 방식으로 추구할 때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악이 추구하는 것들은, 결국 선에서 훔쳐와야 하는 것들입니다.


 다시 하나의 문제입니다. 

 Q.세상이 하나님의 뜻과 다르다면, 절대적 존재의 의지에 반하는 일이 왜 일어나나요?

 A. 결국 '자유의지'가 악을 가능케 했습니다. 하지만, 사랑, 선, 기쁨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 또한 '자유의지'입니다.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좋아하는 로봇을 잔뜩 만들어서 사랑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테니까요.


 어쨌든, 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남겨 주셨습니다.

 1. 양심. 도덕법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2. 부활에 대한 희망입니다. 대속제물에 대한 이야기가 예로부터 있어 왔습니다.

 3. 다음으로는 성경(구약)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해 이야기를 풀어나가셨죠.

 4. 마지막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변증이 이어집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주장했으며, 우리 죄를 용서한다고 선포했습니다. 그가 신의 아들이 아니라면, 신이라는 선과 맞서는 독립된 악이 됩니다. 그리고 그가 동등하다고 주장한다면, 위에서 말한 이원론과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이죠.

 이렇게 어려운 방향으로 끌고 가지 않아도, 그의 주장은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 기준으로 볼 때, 그가 한 말이 굉장히 무례하고 교만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으며 그가 '나는 하나님과 동등하다!' '너희의 죄를 사한다!'라고 말할 때, 전혀 우스꽝스럽거나 자만에 차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한 일입니다.


그의 주장 중에 이제는 우리 귀에 너무 익은 나머지 무심코 흘려듣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를 용서해 준다는 말, 그 어떤 죄라도 용서해 준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이것이야말로 웃음이 나올 정도로 황당무계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용서라는 것은 해를 입은 사람이 해를 끼친 사람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즉 여러분이 제 발을 밟았을 때 제가 여러분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발을 밟히지도 않았고 자기 돈을 도난당하지도 않았으면서 다른 사람의 발을 밟고 돈을 훔친 당신의 죄를 용서해 주겠노라고 선언하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그것은 아무리 부드럽게 표현한다 해도 얼간이짓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바로 그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그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선언했으며, 그들에 죄에 피해를 입은 이들의 의견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스스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당사자인 양 행동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정말 하나님일 경우만 이해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의 법을 깨뜨리며 그의 사랑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닌 존재가 이런 말을 했다면, 역사에 등장했던 그 어떤 인물보다 우스꽝스럽고 자만에 찬 짓을 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조차 복음서를 읽을 때 그에게서 우스꽝스럽거나 자만심에 차 있다는 인상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편견 없이 복음서를 읽는 사람들은 두말 할 나위가 없지요. 그리스도는 스스로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했고, 우리는 그의 말을 믿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가 인간에 불과할 경우, 온유나 겸손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고 해야 할 말들을 자주 했다는 사실은 알아채지 못하지요.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나는 예수를 위대한 도덕적 스승으로는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주장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말을 그 누구도 못 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 불과한 사람이 예수와 같은 주장을 했다면, 그는 결코 위대한 도덕적 스승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정신병자거나, 아니면 지옥의 악마일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지금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미치광이거나 그보다 못한 인간입니다. 당신은 그를 바보로 여겨 입을 틀어막을 수도 있고, 악마로 여겨 침을 뱉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의 발 앞에 엎드려 하나님이요 주님으로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니 어쩌니 하는 선심성 헛소리에는 편승하지 맙시다. 그는 우리에게 그럴 여지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그럴 여지를 줄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 땅에 왔을까요? 기독교의 공식은 분명합니다. 그는 죽기 위해 이 땅에 왔습니다. 그의 말대로, 그는 우리를 용서하고 대신 죽음으로써 죄를 씻어 주기 위해 이 땅에 온 것입니다. 공짜는 없습니다. 죄에 대한 대가는 누군가가 치러야 했고, 그는 그 죄값을 치르러 이 땅에 왔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우리는 '회개'라는 것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 회개를 할 수 있게 되었냐구요? '회개'라는 것은 '전속력으로 뒤로, 즉 하나님께로 도는 동작'을 의미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지요. 하지만 이런 '내려놓음'은 하나님의 본성에 없는 도움입니다. 회개를 위해서는 항복, 순종, 고통, 죽음이라는 것이 필요했는데, 이것은 절대자에게 없는 본성이었거든요.

 결국 우리가 저런 본성을 찾아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항복, 순종, 고통,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는 완전하게 복종했고 완전하게 낮아졌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새로운 종류의 인간이 나타났습니다. 



여기까지가 1~2장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3장에서는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대한 세부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장 와닿았던 부분은 '판단하지 말라'는 부분입니다. 사람마다 태어난 기준점이 다르고, 같은 행동을 저지르더라도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죠. 외모가 중요한 요소인 우리나라를 예로 들어 생각해 봤습니다. 누군가는 태어날 때부터 예쁘고 잘생겨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쁨을 받고 자존감이 넘친 덕에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살고,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은 크고 작은 차별을 당하게 됩니다. 애기 때 한번 더 안아주고 말고의 차이가 커서는 점차 벌어지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이 같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과연 세상의 법처럼 하나의 기준으로 죄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루이스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외 3장의 이야기는 직접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다음은 마지막 4장입니다. 제가 가장 깊은 깨달음을 얻은 장입니다.



 천국의 빛줄기를 맛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지도가 있습니다. 바로 신학입니다. 지도는 실체가 아니지만,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발걸음을 어디로 떼야 할지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물론 실체를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그 지도가 소용이 없겠지만요. 하지만 실체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지도만 바라보고 고쳐가는 것만으로 제 위치에 설 수는 없습니다. 


 자아를 지키면서 선량해지려는 노력. '내려놓음'이라는 책에서는 '자기 의'로 표현했습니다. 단 하나, 내 자아만 온전히 그분께 드린다면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는데, 그 자아를 내려놓기가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에 대한 대가를 알기에 그것을 내려놓지 않으려는지도 모릅니다. 루이스는 하나님을 '치과의사 같은 분'이라고 말합니다. 아픈 이 하나만 치료하러 갔는데, 다른 이까지 모두 치료하시는 분이라는 것이죠. 우리 삶에서 악한 부분 하나만 그분께 내려놓고 싶지만, 그렇게 자신을 맡겼을 때 감내해야 할 고통 때문에 우리는 섣불리 치과에 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하나만 고치는 방식으로는 일하지 않으시죠.

 고침 이후의 우리 모습이 완전해지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받았다, 믿는다고 말하는 수많은 약하고 악한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위에서도 말했듯, 사람마다 태어난 기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믿기 전의 모습보다는 훨씬 달라진 모습들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아기의 세상에서는 자궁 안이 가장 안전한 장소이지만, 그곳에 영원히 머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결국 새로운 단계, 영원한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길은 2장 끝에서 말한 그리스도입니다. 그가 가르친 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 예수의 모습으로 가장하는 것이죠. 그것이 그가 시킨 일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모습을 바꾸고 내 자아를 버릴 때, 우리는 진정한 우리 인격을 갖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내 자아'라는 것은, 텔레비전과 책, 주위 사람들 등의 주위 환경에서 온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내가 믿는 '나'는 생각보다 주체적이지 않지요. 결국, 우리가 버려야 할 '내 자아'라는 것이 그렇게 크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기도하도록 만든 원동력은 성령 하나님이죠. 기도의 목표도 하나님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 안으로 이끌려 가지만, 동시에 우리 자신으로 남아있게 됩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믿음을 또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겠습니다.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나 자신의 이야기로요.

우리가 우리의 노력으로 선해지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교만을 쌓음으로서 하나님과 더 반대 방향으로 가는 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길의 끝, 하나님과 가장 멀리 있는 곳까지 가서야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됩니다. 자신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이 우리와 어떤 거래 관계에 있는 분이 아님을 인정하게 되는 지점입니다. 결국, 우리의 모든 노력이 하나님께 다가가게 할 수는 없지만, 그 끝에서 "나는 못합니다. 당신이 하셔야 합니다."라는 고백의 순간으로는 이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항복하기 위해서는, 노력을 포기하기 위해서는, 결국 먼저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그 '터닝 포인트'이후로도, 우리는 다시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때의 노력은 그 전과는 다른 부분입니다. 이전 우리의 몸부림이 구원받기 위한 노력이었다면, 이후의 노력은 구원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노력입니다. 즉, 믿기 때문에 행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국의 희미한 첫 빛줄기를 맛본 사람들의 삶입니다.


마지막으로, 인터스텔라 책장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는 방식입니다.

우리의 시간은 한 순간씩 다가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간은 그렇지 않죠. 시간을 창조한 분이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세운다면 이해가 될까요?

태초 이래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에게는 '현재'입니다. 우리의 아주 짧은 찰나의 기도조차도 그분은 영원무궁히 들으실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내일'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정해놓았기에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라고 할 수 없겠죠. 하지만 하나님의 시간에서는 내일의 일 또한 우리가 이미 한 일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구원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믿느냐는 것입니다.